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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종이의 나라/김영아

에세이향기 2024. 1. 12. 02:45

종이의 나라

 

김양아

 

 

등 굽은 새벽이

낡은 손수레에 쌓아올린 묵직한 산을 끌고 간다

어느날 악몽을 꾼 나무들이

두꺼운 종이상자로 변신해 차곡차곡 포개진다

 

 

소비를 즐기는 도시는 끊임없이 포장을 벗겨낸다

택배는 쌓이고

박스의 접힌 각이 풀리고 모서리가 무너진다

바깥으로 밀려나 독거노인과 한 묶음이 된다

 

 

종이의 나라

그들만의 거래처는 치열하게 움켜쥔 밥줄이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내주지도 않는다는 게

그들 사이의 불문율,

땀 한 되에 60원을 쳐준다는 종이박스는

앞 다투어 수거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로

고단한 노구를 밀어내는 도시

시장골목과 상가를 돌아온 새벽이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저 아찔함, 다급한 클랙슨이 바퀴를 밀어붙인다

 

 

발품을 팔아 엮은 오늘의 노동이 기우뚱거린다

 

 

질경이의 꿈


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제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꼽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러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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