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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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만년필 / 송찬호

에세이향기 2024. 1. 11. 20:05

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별 1 / 송 찬 호

너의 눈은 검은 물, 모든 강물이

그 검은 밤으로 흘러가 증언이 되었다

그 밤의 가시 돋친 증언이 되었다

너의 눈은 그 가시에 찔렸다

이윽고 너의 눈은 어두운 밤이 되었다

말의 가시에 찔려 피흘리는 붉은 밤이 되었다

깊은밤, 너의 눈은 두 개의 검은 돌

두 형제가 마주보고 얼굴을 서로 어루만졌다

어두운 기억 속 묘비명을 더듬듯이

나는 제가 잡히던 그 특별한 밤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밤들이 너를 포로로 보호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모든 밤들이 너를 위하여 있었다

너는 밤마다 켜져 있었고,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았다

때로 너로부터 도망치려 너를 잊으려

모든 밤들이 너를 밟고 끄고 지나갔지만

너는 죽지 않고 있었다

또 새로운 밤이 가장 가까이 있었다

모든 밤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 그 이튿날 밤이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시집 [10년 동안의 빈 의자] 중에서

 

촛불 / 송찬호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계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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