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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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풍장/황동규

에세이향기 2024. 1. 13. 10:41

풍장/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마음보다 눈을 / 황동규
 
 
 


'지금 내 마음은 저 붉고 둥근 해 넘어가기 직전
아직 빛이 남아 있는 검푸른 하늘 한 조각
돌돌 말아 속에 간직하고 싶다.
저 빛마저 사라지면
지난해보다 전깃불 두 배로 켜서 밝히는
덜 어둠으로 더 어둠을 밝히는 밤이 오리라.
허나 조금 전 신문에서 이름 글자 하나 잘못 읽고
이름 좀 제대로 달고 다녀! 내뱉은
내 속의 어둠이 더 캄캄하다.
방금 발 헛디뎌 휘청거린 저 보도블록 파인 자리도
내 속보다는 덜 파였다.'
47년 만이라는 추위를 헤치며
카페인 파낸 커피 사러 슈퍼에 가면서
누군가 촌스럽게 투덜댔다.
이번엔 파인 보도블록을 슬쩍 피하며
누군가 다독엿다.
'마음보다는 그래도 눈을 믿게'
 
 
귀뚜라미/ 황동규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켠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부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에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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