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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