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마늘을 까며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뽀얀 속살/우리가 원하는 건 겉이 아닌 속이지만/수북이 쌓인 껍질도 제 할 일 다한 은빛//손끝에 스며든 진 은근히 아려올 때/골목시장 한 모퉁이 쪼그려 마늘 까던/아낙네 몸에 밴 수고 알싸하게 떠오른다/한 점 마늘처럼 엮여 있는 하루하루/쭉정이만 이리저리 흩어놓은 시간 앞에/이 빈손 허무했겠다/마늘마저 안 깠으면
「당신, 원본인가요」(2022, 시와소금)
‘마늘을 까며’는 소박한 생활시조다, 그렇지만 삶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 있다. 마늘은 식생활에 요긴한 재료다. 많은 요리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몸에도 이로운 식품이다.
보통은 깐 마늘을 구입하지만 이 작품의 화자는 마늘을 까고 있다. 그래서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뽀얀 속살, 이라면서 우리가 원하는 건 겉이 아닌 속이지만 수북이 쌓인 껍질도 제 할 일 다한 은빛, 이라고 노래한다. 버려질 껍질에 눈길을 주고 있다. 손끝에 스며든 진 은근히 아려올 때 골목시장 한 모퉁이 쪼그려 마늘을 까던 친근한 아낙네 몸에 밴 수고가 알싸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한 점 마늘처럼 엮여 있는 하루하루를 기억한다. 그만큼 소중한 나날인 것이다. 화자는 쭉정이만 이리저리 흩어놓은 시간 앞에서 빈손이 허무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정말 마늘마저 안 깠으면 그랬을 터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작품해설에서 견딤과 위안을 주는 치유와 긍정의 기록을 이번 시조집에서 충실하고도 심층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보고 있다. 덧붙여서 다양한 입체적 도록으로서 가독성과 내질에서 단연 아름답고 중중하게 다가온다고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단시조 ‘볏단’을 읽어본다. 온몸 탈탈 털려 낟알 다 내어주고 빈 몸 싹둑 썰려 겨우내 소 먹이고 들불로 피어날 기운 마른 짚에 잠재우고, 이다. 볏단의 헌신과 희생은 이처럼 크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진배없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광 시인은 ‘꿈틀’의 셋째 수에서 식은 재 묻은 가슴 불씨가 살아 꿈틀 꿈에도 길목 있어 아늑한 목이 있어 강줄기 띠를 두른 산 그곳으로 또 가자네, 라면서 귀거래사를 읊조리고 있다. 산기슭에 살면서 나무랑 풀꽃이랑 산새 물새와 사귀면서 자연인으로 살고자하는 열망을 보인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일찍이 예이츠가 ‘이니스프리의 호도’에서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라고 노래한 것처럼 어느 호젓한 산 밑에 터를 잡아 새로운 꿈틀거림의 날을 맞이했으면 한다.
그런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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