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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 / 이석현

에세이향기 2023. 5. 31. 02:53

용접 /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

금속재료를 접합하기 위해 접합부에 금속을 가열 용융시켜 서로 다른 두 재료의 원자결합을 재배열 결합시키는 것을 용접이라 하고, 용접결과의 좋고 나쁨을 ‘용접성’이라고 한다. 오래 전 성수대교 붕괴의 주원인이 공기를 무리하게 줄이고 터무니없이 단가를 낮추려 마구 땜질한 ‘용접성’불량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이 이뤄지는 법인데, 서툰 땜질은 용접이라 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70년대 중반 모 헌병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할 당시 한 사건의 서류 조사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두 철판 사이에 용접봉을 대고 용접기로 불을 뿜어내어 그 셋을 동시에 녹여 하나로 완전히 엉겨 붙게 해야 하는데, 어설프게 쇳물을 녹여 붙인 탓에 셋의 쇳물방울들이 따로따로 굳어져 그 부위를 망치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져 버리는 부실한 용접이 인명사고를 불렀던 것이다. 쇳물이 녹았다가 식었다고 해서 다 용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이어야 하는데 그 수고와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쇠판과 용접봉을 녹여낸 후 적절한 타이밍에 확 끌어안게 하는 기술. 그런 과정을 균일하게 이끌고 가야하는 인내심과 집중력, 그리고 손끝의 감각이 용접성을 높이는 최선이다. 잘 된 용접 부분은 식고 난 다음에 보면 아주 작은 파도가 화석처럼 굳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파도 모양의 일정함으로 기술자의 기량을 평가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잘 된 용접부위는 원래의 몸체보다 훨씬 강해 떨어질 줄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흘러 몸체가 녹슬어 망가져도 용접 부위는 그대로이다. 견고한 결합이 본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 또한 그렇겠다. 불량한 용접이 판치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용접과 같은 사랑과 우정이란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야 하고, 뜨거워져야 하고, 또 그 뜨거움을 견뎌야 하는 것. ‘보안경 너머로’ 이글거리는 쇳물을 정확하게 읽고 판단해야 하는 것. 내 쇳물방울이 터지지 않고 상대와 섞일 수 없으며, 온몸으로 ‘시뻘겋게 달아’ 젖어 보지 않고는 덜컥 용접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오랜 기간 포스코에서 쇳물 전문가로 일 했던 시인에게서 듣는 ‘용접’ 훈수로 다시 내 삶의 용융 온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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