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름의 뼈
조선의(1960~ )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가 깜냥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드름이 향한 곳은
아찔한 처마 끝이거나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하는 땅바닥
이렇다 할 옹이도 없이 아래로 오르는 정점
설원에 닿지 못해 사라진 입김들이
난반사되듯 구름의 역린에 달라붙는다
흔한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
제 살을 훑어 뾰족한 마음의 가시마저 녹여내는
안간힘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눈꽃 한 송이 필 수 없는 사막 어디쯤
저 몸뚱이 툭 부러뜨려 뚝딱 집 한 채 지으면
생의 단면들이 입자로 부서져
내 척박한 체념까지 한꺼번에 쓸어가 버릴까
한순간도 감출 수 없는 투명한 기척
결기를 세웠던 뼈들이 물로 녹아든다
조선의 시인
수상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기독신춘문예> 당선, <미션21> 신춘문예 당선. 김만중문학상, 거제문학상, 신석정촛불문학상, 백교문학상, 등대문학상, 안정복문학대상, 신성문학대상, 송순문학상 등 수상
시집 『당신 반칙이야』 『어쩌면 쓰라린 날은 꽃피는 동안이다』 『빛을 소환하다』 『돌이라는 새』 『꽃, 향기의 밀서』 『꽃으로 오는 소리』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등이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17번째 시는 조선의 시인의 “고드름의 뼈”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래를 향하여 지형에 구애 받지 않고 흐르고 흘러 마침내 큰 집단을 이룹니다. 물은 또한 액체에서 고체로, 기체로 변화무쌍하게 변신을 잘도 합니다. 그러나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수증기가 되어서도 하늘은 낮은 곳에 불과할 뿐입니다.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서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를 한 것이 “고드름”입니다. 시간을 켜켜이 쌓아온 고드름의 역사입니다.
동물이나 식물 등 생명이 있는 것들은 “옹이”를 만들어 상처를 치유하거나 자기 발전합니다. 대나무의 마디가 그렇고, 시골 동네 앞 늠름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의 많은 옹이가 그렇고, 그것들을 망라하는 나무들의 나이테가 그렇습니다.
고드름은 다릅니다. “고드름이 향한 곳은/ 아찔한 처마 끝이거나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하는 땅바닥”입니다. 그러나 낮은 곳을 향하는 본성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상처는 있을망정 자기 안으로만 식힙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 “옹이도 없이”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세상이 시끌벅적합니다. 모두 자기주장뿐입니다. 단단한 주먹과 힘찬 구호만이 세상을 살아내는 무기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제 살을 훑어 뾰족한 마음의 가시마저 녹여내”며 “존재를 증명”하는 고드름을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기를 세웠던 뼈”마저 “물로 녹아”내는 지혜가 그리운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