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우주 전파사/정영효

우주 전파사 정영효 노인은 형광등의 멍처럼 쓸쓸한 눈으로 안경을 벗는다 음각이 색겨진 얼굴과 뒤틀린 다리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듯 몸은 앞으로 껴안으며 휘어졌다 불룩한 천장아래 놓인 라디오들에서 금성과 삼성이 이따금 반짝거리고 블랙홀에 빠져들 듯 화면이 멈춘 텔레비전은 희미하게 교차하는 신호를 잡지 못한 채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렸다 세월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가고 있다 멀리 타전된 암호처럼 한 시절이 지나면 노인도 아득한 곳으로 전송될 것인데 잡히지 않는 채널이 켜진 듯 부스스한 유리문 밖 불빛에 갈라진 거리를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눈은 월식처럼 어둡다 수리를 끝낸 텔레비전을 맨손으로 닦자 허공의 무늬를 따라 유영하는 먼지들 밤사이 어둠이 이 모두를 정리할 것이다 잃어버린..

좋은 시 2023.02.04

슬픔의 바깥/신철규

슬픔의 바깥 - 낮달 신철규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보자기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긴다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파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 보도가 한없이 펼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파란색 소형 승합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좋은 시 2023.02.04

같은 바다는 없어요/박재연

같은 바다는 없어요 박재연 ​ ​ 당신에게는 백 년 동안 술에 취해 살다간 한량의 유전자가 흐르고 나에게는 극지를 유랑하며 살다 간 무사의 유전자가 흐른다 당신은 서해의 개펄에 나가 하루치 식량이나 캐며 살자고 하지만 나는 동해의 해풍에 두통이나 말리며 살고 싶다 동해와 서해는 다른 바다일까 해가 지고 또 지는 서해는 사람을 살리는 바다라고 하고 단호하게 파도치는 동해는 냉정해서 싫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은 육산에서 태어나 고기잡이를 좋아하지만 나는 악산에서 태어나 은산 철벽을 좋아한다 바다는 바다이고 산은 산이기만 한 걸까 당신은 당신에게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일까 물 때 달력이 한 장 남은 서해 바닷가 야외식탁 노을과 바다는 한통속으로 붉어지고

좋은 시 2023.02.04

어린 봄을 업다/박수현

어린 봄을 업다 박수현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숙한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 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좋은 시 2023.01.31

어깨/김초혜

어깨 어머니의 어깨는 기대고 기대어도 포근한 어깨 아버지의 어깨는 기대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어깨 # ‘쟤 좀 보세요. 어깨에 마구 힘을 주며, 자기과시를 하네요.’ 누구에게 배운 걸까? 얼마 전 친구가 맡긴 잉꼬 한 마리가 외로워 보여 암컷을 구해 새장 안에 넣어 주었다. 새장 속에서 먼저 살던 잉꼬는 새로 들어온 잉꼬 주변을 몇 번 돌더니 보란 듯이 어깨를 힘껏 부풀리며, 이 새장 안은 자신의 영역임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경우도 상대보다 힘이 세거나 권력이 높은 사람들은 잉꼬 새처럼 어깨를 과도하게 펴고 몸을 부풀려 ‘확대자세’를 취하며 공간을 상대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깨”는 남성적 매력의 포인트 중 하나라고 여긴다. 어깨는 위엄과 권력의 상징이고, 책임감을..

좋은 시 2023.01.29

낙상落傷/오정국

낙상落傷 보기 좋게 벌러덩 나자빠지지도 못한 채 비탈길을 헛딛는 순간, 아이쿠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의 음성인지 나도 몰랐다 여태껏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 몸에 깃든 사람 하나 벼랑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외마디소리 부지불식간의 아이쿠 까마득히 잊고 지낸 아이쿠 감감무소식의 아이쿠가 생면부지의 사람 하나를 들춰냈던 것이니 비로소 내 면상이 화끈거리고 그토록 그에게 빚진 일이 많았던가 이토록 기막힌 아이쿠 무시무시한 아이쿠 순식간의 아이쿠 분명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잡목림 덩굴이거나 허공의 어디선가 울려온 것 같았는데 # “아이쿠”. 잠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였다. 발 한쪽을 깁스했을 뿐인데, 누웠다 일어나려는 데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살아오면서 누웠다 일어나는 것이 그리 쉬..

좋은 시 2023.01.29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김완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 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 나는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바다 냄새를 토하며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 집도 사라졌다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진지 오래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를 향기롭게 하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구원과 위안은 미래의 원대한 것보다 오늘의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온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 ..

좋은 시 2023.01.29

대답 / 이도훈

대답 / 이도훈 동그란 감자 씨를 세 쪽으로, 세모꼴로 나누어 심었다 땅속은 난감했을 것이다. 땅속에서 골똘히 궁굴렸을까 갸우뚱, 세모꼴들은 동그랗게 바뀐다 한 알의 씨감자가 땅을 설득하고 요동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의 소속이니까 별의 본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진도 없이 울렁거리지도 않고 감자알 크기의 땅속을 내주는 여름 땅, 한 줌의 햇살과 한 손바닥 빗물만으로 둥글둥글 살찌는 감자는 삐걱거리지도 않고 툴툴거리지도 않고 모난 종자쯤은 스스로 버린다 봄, 세모에 단 한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주렁주렁 둥근 대답을 듣는다

좋은 시 2023.01.28

그 겨울의 弓港/김경윤

그 겨울의 弓港 김경윤 그 겨울 어데도 둘 곳 없던 마음이 먼저 바람처럼 포구에 가 닿았다 서해 물마루까지 눈시울을 붉히는 변산반도 거기 활시위처럼 팽팽한 궁항이 나를 끌어당겼다 이제는 표적을 잃어버린 마음 속 화살들 하나씩 꺼내어 저문 바다에 조약돌로 날려보냈다 병든 몸으로 생의 벼랑에서 적멸을 꿈꾸기도 하고 더러는 毁折한 세월*을 술잔으로 달래기도 했지만 살처럼 흘러간 지난 세월들을 생각하면 더럽게 타락해버린 자본의 세월을 향해 부질없이 내던진 죄없는 조약돌들은 다시 또 내 가슴에 와서 상처로 박혔다 그 날, 밀물드는 저녁 항구에서 그저 찬바람 속으로 쓸쓸하게 날아가던 둥지 없는 갈매기의 꿈을 생각하며 나는 또 얼마나 오래 어두운 별빛 아래서 나 대신 울고 있는 파도를 연민으로 달랬던가 그래도 그 겨..

좋은 시 2023.01.26

풍치 - 김경윤

풍치 - 김경윤 - 김경윤(1957~) 전남 해남 출생 오십 고개 앞두고 풍치가 왔다 풍찬노숙의 시절에도 한눈 판 적 없이 불혹을 넘어 왔는데 잇몸에 바람이 들다니! 바람이 들거나 나거나 바람은 뿌리를 흔드는 것 뿌리가 흔들리면서부터 자꾸 생이 불안하다 벌써 어금니 두 개나 무너졌다 태풍에 서까래가 무너진 공가처럼 이빨 빠진 자리가 허허롭다 쇠고기는 고사하고 무말랭이 하나 제대로 깨물 수 없으니 바람 든 이로 또 무엇인들 씹을 수 있겠나 (세상은 얼마나 단단하고 질기던가!) 이제 함부로 입 벌리는 것도 남세스러운 일 그새 잇몸에 바람 든 지도 모르고 염치없이 입술을 나불거리고 다녔다니! 풍치가 오고부터 염치가 생겼다 입안의 말들도 부드러워지고 자꾸 말랑말랑한 것들이 그립다

좋은 시 2023.01.26

오십견/박일만

오십견 / 박일만 ​ ​ 뭇매처럼 맵다 근육들이 아우성이다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이내 신경을 타고 다니며 전신을 마비시킨다 수십 년 부려먹고 세상 끝으로 내몰았던 몸뚱어리가 폐기 처분될 처지다 불청객도 이만하면 무뢰한이다 곤장보다 더 사나운 이 신종 매질, 어질게 살아온 나에게까지 치도곤을 안긴다 하필이면 가진 것 쥐뿔도 없는 내게 쓸만한 근육은 죄다 내놓으라는 듯 몸속의 진이 쏙 빠지도록 쳐댄다 뭇매보다도 더 맵다 순간순간의 통증이 녹아들어 영혼까지 뒤흔드는 ​ 사랑니 / 박일만 ​ ​ 뺐다, 버티다가 늘그막에 하나도 아니고 두 개 뺐다 쓸모없다 충치만 양산한다 했다 오래 전부터 본성을 숨기고 내 몸속 겨우살이로 살아왔다 어지러운 세상 먹고살기도 빠듯한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

좋은 시 2023.01.20

봉합 / 박일만

봉합 / 박일만 ​ 어머니는 꿰매신다 신접살림으로 장만해 온 이불을 꿰매고 강산이 여러 번 바뀐 옷을 꿰매고 식구들의 해진 양말을 꿰매고 속곳을 꿰매고 깨진 조롱박 바가지를 꿰매고 자식들이 벌여놓은 사건을 꿰매고 잔소리 하는 아버지 입을 꿰매고 터져 나오는 울분을 꿰매고 문틈으로 새어나가는 살림밑천을 꿰매고 행여 금갈세라 나이든 자식들의 우애를 꿰매고… ​ 늘 꿰매는 삶이 주제인 어머니 ​ 전북 장수 출생. 2005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 ​ [여행노트] 요즘 거개의 똑 부러지는 젊은 어머니들은 찢어놓는 것이 주제다 무능한 아버지와 자식 사이를 찢어놓고. 형제 자매 사이를 찢어놓고 媤 자라면 시금치도 안 먹는다며 시댁 과..

좋은 시 2023.01.20

황태덕장/박일만

황태덕장 황태덕장 /박일만 젖은 습기마저 바다에 돌려 준 너희들 폭설을 맞고도 떠는 기색이 없네 삼삼오오 스크럼을 짜고 빳빳한 온기 나누며 겨울의 언덕을 타고 노네 그래도 왜 외롭지 않겠는가 올해나 작년에 다녀간 식솔들의 흔적 위에서 혹한을 견디는 일 맨살로 얼다 녹으며 세상 건너가는 나의 계절은 힘줄 만큼이나 질긴 것이네 살갗을 찌르는 동토의 바람 드디어는 조금도 아프지 않네 - 박일만 시집 ‘뼈의 속도’ 인류애적인 사랑을 주고 떠나겠다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의 다짐은 한낱 공허한 울림일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 역시 생생하게 와 닿지가 않는다. 겨울 덕장의 황태처럼 맨살로 얼다 녹으며 세상을 건너가야 하는 우리들의 힘은 그렇게 멀고 큰 사랑에서 오는 것이라, 가까이에서 손을..

좋은 시 2023.01.20

가장 낮은 곳의 말(言)/함종대​

가장 낮은 곳의 말(言)/함종대 ​ ​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

좋은 시 2023.01.17

따뜻한 황홀/김경성

1. 따뜻한 황홀 김경성 어떤 나무는 절구통이 되고 또 다른 나무는 절구공이 되어 서로 몸을 짓찧으며 살아간다 몸을 내어주는 밑동이나 몸을 두드리는 우듬지나 제 속의 울림을 듣는 것은 똑같다 몸이 갈라지도록, 제 속이 더 깊게 파이도록 서로의 몸속을 아프게 드나든다 뒤섞인 물결무늬 절구통 가득히 넘실대며 절구공이 타고 흐른다 김경성 시인-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11년 《미네르바》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와온』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이 있다. 2017년 세종나눔 문학도서에 선정. 무술년이다. 신정 지나고 추위가 풀린 날 차 마실 가는 길, 어느 허름한 너와 집 담장 너머 왼쪽 귀퉁이에 낡은 절구통이 보인다. 어릴 적 집집마다 가을걷이 전 찐쌀을 빻거나 간단하게..

좋은 시 2023.01.17

나이테를 풀다 외 4편/김양아

나이테를 풀다 외 4편 ​ 김양아 그 숲 한 귀퉁이가 무너져 있다 뿌리만 남겨둔 채 떠난 여행 어디에 닿아 무엇으로 환생했는지 알 수 없다 ​ 평생 붙박이로 살았던 그 자리 나이테를 공유했던 몸통은 떠나고 낮게 베어진 자리 둥근 언어로 새겨진 기록만 남았다 빽빽한 간격으로 견뎌낸 추위와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치열했던 생의 밀도를 읽는다 ​ LP판 한 장 올려놓은 턴테이블 흑백영화의 자막에 흘러내리던 빗물처럼 지직거리는 잡음마저 아련한 그 시간 속으로 감겨든다 오래된 레코드판이 풀어내는 무성한 계절의 노래 가지런한 동심원으로 번진 그루터기를 보며 묵묵하게 살아낸 연륜을 헤아려본다 ​ 큰 그늘 드리웠을 나무 남겨진 굵은 밑동에서 한 생애를 추적한다 ​ 포구 바닥 ​ 깊은 바닥을 훑던 그물, 갓 출하된 기운이..

좋은 시 2023.01.16

물끄러미

물끄러미 / 문태준 ​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 - 문태준, 『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 ​ ​ ​ ​ 물끄러미 / 정호승 ​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좋은 시 2023.01.07

파지/천양희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좋은 시 2023.01.04

오래된 농담/천양희

오래된 농담/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홥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

좋은 시 2023.01.04

멸치 타작 /유계자

멸치 타작 유계자 저녁 물빛이 파도에 젖어갈 무렵 바다의 봉제선이 열리고 멸치들이 올라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투 유자망 어선에 그물을 올리고 내리는 일 멸치잡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합치면 백 년의 고목이다 태풍이 몇 번이나 휩쓸어도 고집 센 뿌리는 잘도 버텼다 대처로 나가 단번에 어군을 찾아내고 던져라! 호기 있게 목청을 높여 배 한 척 아버지 이름 붙여주고 싶었는데 마음뿐인 효도는 바다가 너무 일찍 받아 갔다 대신 바다 농사를 소작으로 물려받아 일정한 간격으로 부표를 오르내리고 꼬인 생을 풀고 찢어진 날을 기워 재투망을 하며 간간이 그물을 펼칠 때마다 환하게 꽃피는 밤 비린내를 손으로 훑으며 밤새 달라붙던 질긴 졸음을 에헤 에헤 봄볕에 이불을 털 듯 멸치를 턴다 [출처] 멸치타작 / 유계자|..

좋은 시 202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