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봄을 업다
박수현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숙한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 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얕은 숨을 내쉬며 옹알거렸다
멀리서 온 그 말씀, 하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포대기를 추슬렀다 출렁,
한 뼘 더 팔이 길어졌다
『샌드 페인팅』(천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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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건너뛰고서야 알게 되는 사랑의 기술이 있었으니 인생이 참 오묘하다. 어미로서 자식을 낳아 기를 적에 아이의 존재는 사랑이 우선이기는 해도 책임과 의무감에 더 속박받는다. 자식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다급함은 질책과 냉정한 훈육이 앞서기도 하니 정작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시간마저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세월이 흐른 후, 부모는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한 양육방식을 후회하기도 하고 어떤 자식들은 부모와 같은 방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며 반대급부적인 양상을 띠기도 한다.
그런데 자식들이 자라서 아이를 낳으면 그 어린것은 나비처럼 가볍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자식에게 미처 주지 못한 애정이 뒤늦게 샘 솟는 건가. 아니면 연륜이 깊어져서 사랑에 대한 자세가 원만하고 원숙해지는 건가. 그 이유의 핵심은 거리 두기에 있다. 적당한 간격이 필요한 진리가 여기에도 통한다. 집착이나 소유를 하지 않으니 존재가 바로 보이는 것이다. 아이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사랑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소유는 일부를 갖는 것이나 존재는 모두를 갖는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이를 바라보고 느끼는 존재감과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충만하니 시적 화자는 어린 봄을 모두 품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화자는 나비잠에 빠진 손주를 등에 업고서야 슬픔의 정면을 알아챈다. 가슴으로 받아냈다고 여긴 것들이 실은 등에 기대어 있었던 것, 가슴에 파묻힌 많은 일들을 모두 등짝이 받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어린것의 온기가 반대로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으니 그것이 곧 사랑의 재발견이 아닌가. 나비처럼 날아가 버릴까봐 조심스러워 시적 화자의 팔이 한 뼘 더 길어진다는 대목에서 한없이 맑은 사랑이 일렁이는 봄날을 느낄 수 있다.
무릇 사랑이란, 이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쥐고 흔들고 모양을 만들어서 품에 안으려는 갈증이 아니라 나비잠 깰세라 얕은 숨 가만히 들으며 팔을 한 뼘 더 늘여주는 정성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기분 좋은 이 사랑은 기대와 보상심리가 완전히 삭제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여서 환희심마저 안겨준다.
<창작21>2020 가을호
박주하 / 1996년《불교문예 》롤 등단.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 문예진흥기금수혜. 시집 『항생제를 먹으며』 『숨은 연못』
배미향의 저녁스켓치(23020년 4월 20일)
내 아이를 키울 때는
너무도 고단해서 느끼지 못했던 행복이
오랜만에 아이를 안으면 생각나죠.
겨우 두 뼘 밖에 안 되는 아이의 등이
온 기억들을 몰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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