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견 / 박일만
뭇매처럼 맵다
근육들이 아우성이다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이내
신경을 타고 다니며 전신을 마비시킨다
수십 년 부려먹고
세상 끝으로 내몰았던 몸뚱어리가
폐기 처분될 처지다
불청객도 이만하면 무뢰한이다
곤장보다 더 사나운 이 신종 매질,
어질게 살아온 나에게까지 치도곤을 안긴다
하필이면 가진 것 쥐뿔도 없는 내게
쓸만한 근육은 죄다 내놓으라는 듯
몸속의 진이 쏙 빠지도록 쳐댄다
뭇매보다도 더 맵다
순간순간의 통증이 녹아들어
영혼까지 뒤흔드는
사랑니 / 박일만
뺐다, 버티다가 늘그막에
하나도 아니고 두 개 뺐다
쓸모없다 충치만 양산한다 했다
오래 전부터 본성을 숨기고
내 몸속 겨우살이로 살아왔다
어지러운 세상
먹고살기도 빠듯한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주인도 눈치 채지 못하게
표정을 바꿔가며 천연스레 기생했다
어쩌면 나
힘깨나 쓰던 시절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함부로 연정을 품던
동물적 근성이 뾰족하게 나타나
세상에게 몽땅 들켜버린 것일 게다
그 헤픈 감정 다 뺐다
빼 버렸다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며 / 박일만
자꾸만 기우는 몸을
벽에 세워드리고 등을 민다
구순 넘어 거동 불편하신 아버지
뼈 삭고 근육 무너지는 동안 상처투성이다
가죽 처진 소처럼
늘어진 등판에 무늬가 새겨져있다
강 무늬, 산 무늬, 나무, 돌, 비바람 무늬까지
무수하다
저 등과 어깨로 버텨온 무게가 얼마던가
살을 발라 식솔들 먹여 온 세월 얼마던가
짚고 선 벽은 평생을 두고
맨살로도 넘지 못하신 꿈이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태생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내외하시듯 돌아서 있는 뒤태가 애처롭다
물기를 닦아드려도 또다시 기우는 몸,
아버지 몸에서는 무궁화꽃 향기가 난다
노구를 씻겨드린 밤
꿈속에서 내 팔다리도 가늘어져 갔다
유품 / 박일만
주인 없는 방안에 검은 표정들,
기어이 관절 무너져 실려 가신 후부터
줄곧 문 쪽을 응시한 눈치들이다
오랫동안 건사해 온 것들
적막을 뒤집어쓰고
어머니의 냄새를 풍기고 서있다
거구의 장롱은 그리움 가득 채웠고
식탁은 밥 대신 먼지를 고봉으로 쌓았고
세탁기는 변비에 걸려 내장운동을 멈췄다
TV는 큰 외눈만 시커멓게 껌뻑 껌뻑,
이 방안에
어머니의 손때 묻지 않은 것들 없는데
모두 통째로 폐기 될 처지다
살아오신 내력 한 줄도 없이 지워지리라
흔적이나 남겨두자고
고르고 고른 것이 겨우 옷 몇 가지
그마저도 낡고 헤진 것들
이제
터전은 영영 사라지리라
이승에서의 짧은 생애가
마지막 남긴 것도 텅 빈 공간뿐
텃밭 / 박일만
묵혀 두었던 밭이
버려진 쪽배처럼 측은하다
허허벌판이라는 바다에 고립돼
흔들리는 뱃전에는 폐허만 가득하다
잡초 뽑아내고 냄새풍기는 퇴비 뿌리고
두꺼운 겨울을 갈아엎고 밭둑을 다독였다
흙을 반듯하게 펴주니 밭이 기지개를 켜고 웃었다
분바른 미소년처럼 매끄러운 얼굴,
두둑을 돋우고
바느질 하듯 한 땀 한 땀 씨앗을 심었다
밭은 비로소 잘 수리된 한 척의 배가 되었다
햇살을 받아 이마가 반짝이는,
출항이다
닻을 올린 쪽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제 저 배는 봄이라는 돛을 달고
여름이라는 작물을 싣고
가을이라는 열매를 익히며 푸른 몸으로 항해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라는 항구에 닿겠지
사람살이와 내력이 닮았다
햇빛이 전신에 퍼지자 뱃전에서
씨앗들이 움틀 대며 솟아 날 것 같다
풍덩! 풍덩!
푸르러가는 계절을 헤치고 흘러가는 텃밭
봄을 나침반 삼아,
봄, 들키다 / 박일만
문자가 왔다, 사랑한다고
꼬리에 하트 몇 개 달고 느닷없이 왔다
누굴까, 생소한 번호
너머에서 버튼을 누른 사람은
혹여, 술청에서 잠시 손잡고 놀던 여잘까
노래방에서 낙지처럼 몸 비비던 여잔가
머릿속은 하얗고 기억은 촉수가 낮았다
허랑방탕 시절 하룻밤 풋사랑이었을 거야
애써 갈무리하는데 또 다시 왔다
죄송 …… 잘못 …… 술이 좀 ……
염병할! 지금이 어느 땐데 장난치고 지랄이야!
고목나무에 꽃 필 일 전혀 없거든!
속으로 냅다 질렀는데
갑자기 측은지심이 발동한 거라
얼마나 그리웠으면 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퍼!
얼마나 못 견뎠으면 손가락 스텝이 엉켜!
그의 사랑이 존경 쪽으로 기우는데
만화방창, 창밖에는 봄꽃들이 향기를 뿜어대고요
죄가 있다면 꽃들이 내 전력을 들춰냈을 뿐
그는 죄가 없고
나에게 내 과거만 들킨 꼴이 되었던 거라
이 죽일 놈의 사랑본능이 죄다
꽃 때문이다, 꽃을 소환하라!
비정규직 / 박일만
손님이 뜸한 날에는
불안이 몰려 왔다
주인의 미간이 일그러질 때마다 기온이 내려가
맑은 날에도 눈발이 날렸다
마음보다 먼저 몸이 반응을 해야 했고
관절과 관절이 아우성이었다
막간에 먹는 밥이 자주 목에 걸려,
그때마다
여자의 살아 온 내력이 게워졌다
빈 그릇들이 겪어 온 시절처럼
미끄러질까 가슴조일 때면
설거지 소리가
아이들끼리 부딪치는 숟가락소리 같았다
가슴에 도마무늬가 새겨졌다
주인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쪽잠을 청하면
가장의 부재가
살아야 할 이유에다대고 고함을 질렀다
좀처럼 덥혀지지 않는 쪽방,
벽에 신문지를 덧대고 살았다
코 / 박일만
빛이
등성이에 닿자마자 튕겨나가네
단단하고 긴 마음을 비운 덕이겠지
아무리 후벼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같은 속내로 길게 뿌리 뻗어
자리를 틀었네
두개의 통로로 풀무질 해가며
가슴팍 두들겨 생을 분주히 경작하네
때때로
몸통 부풀려가며 순화된 바람을 들여
심장에 피를 돌게도 하지
더욱이 사주팔자 사나운 내 얼굴 복판에
뼈대를 세우고
모진세상 순하게 살라고 중심을 곧게 잡아주네
비탈진 생애를 꼿꼿이 타고 오르는 너,
석자나 늘어져가는 인생을 나무라듯
집중적으로 나를 관장하고 있네
붉불 / 박일만
숨 가쁜 능선에서 빛을 끌어 모아
열흘을 앓고 열흘 신 내리는 당신에게 엎어지며 자결을 감행하는
천년동안 피 끓는 구릉에서 잉태되는 당신을 더듬으며 붉게, 파랗게 몸을 태우는
긴 숨을 토해낼 때 쯤 천오백도의 의지는 더욱 단단해지네
최후의 사랑이여!
절정의 고개에서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날듯이 사라지는 환희를 누가 알랴!
나는 더디게 타는 꿋꿋함만으로도 생애를 다 짐작할 수 있고
극치로 달궈진 배를 가르고 태어나는 당신은 역사를 저장하는 천상의 빛을 품었고
끝없음이여!
미열과 고열을 넘나들며 탈대로 타오른 사랑이 남긴 불맛을 전신에 걸치고 나타나는
갈등의 불기운 잦아지는 날
오래 데인 흔적을 끊임없이 닦고 닦아서 윤기를 쏟아내는 당신
덩어리인 채 치명적인 몸빛이네
낮과 밤을 무수히 견딘 내가 사그라진 뒤안길
옥색치장을 두르고 오롯이 피어나는
당신은 이승의 한으로
나는 한 삽의 재로
* 붉불 : 청자 굽는 다섯 불 중 네 번째
모친 / 박일만
아파서 곧 죽겠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갔다
두 차례 낙상사고로 누워 계신지 몇 해
겨우 몸 추스르고 사신다
몸은 날이 갈수록 작은 점이 되고
늘어가는 약봉지가 유일한 낙이시다
낡을 대로 낡은 관절들,
숨이 턱에 차도록 도착해 보니
겨우 발목에 통증이시다
걸어서 내 집에 오실 수 있는 지척이지만,
안다, 핑계 김에
다 늙은 자식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발목을 문질러드리자
벌떡 일어나 밥상 차리러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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