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폐선 / 정순

폐선 / 정순 ​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좋은 시 2022.11.19

멸치 똥 / 안광숙

멸치 똥 / 안광숙 ​ ​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 막힌 ​ 삶보다 긴 주검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다의 비밀을 까발려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 나는 멸치 똥 ​ 죽은 바다와 살아 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섬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뜬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 오동나무를 흉내 낸 종이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 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인가 ​ 잘 비운 주검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

좋은 시 2022.11.15

제비꽃인력소 / 한주영

제비꽃인력소 / 한주영 ​ ​ 톱밥을 집어 던지는 목장갑에 잠시 온기가 돋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한다 제비꽃 인력사무소 수많은 이름들 중에 왜 하필 제비꽃일까 물에 잘 섞이지 않는 기한 지난 시멘트 반죽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부들이 불 앞에 모여 있다 이곳에서 김 차장이라 통하는 김이 불쏘시개로 드럼통을 쑤시자 부서진 삭정이들 사이에 박혀 있는 못들이 불을 더 세게 쥐며 휜다 쑤시는 곳이 많아도 파스 한 장으로 봉합된 어깨에 화끈거리는 새소리가 조잘조잘 앉았다가 가고 김은 코에 묻은 검댕을 제 검지로 연신 문지르며 인부수첩을 넘긴다 동이 틀 듯 긴장한 가건물 사이의 허공이 쓴 구름에 휩싸여 흐리게 빛을 풀고 때마침 수첩 페이지를 넘기자 바스락거리던 이름들 종이 끝이 나무였을 적을 기억하려 습기를 그러모아..

좋은 시 2022.11.15

못에 대한 단상 / 정성수

못에 대한 단상 / 정성수 ​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쓸 영정 사진을 걸려고 안방 벽에 못을 박았다 못머리를 쳐대자 콘크리트 벽은 아직은 못을 받아드릴 때가 안 되었다는 듯이 구부러지고 만다 못을 바르게 세워 쳐 댈수록 제 몸의 상처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벽 사정없이 망치질을 해 대자 못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로운 끝을 생살에 받아들인다 올곧게 서 있는 못에 아버지의 일생을 걸어두자 굽은 못도 바로 세워 주기만 하면 제 할 일 다 할 수 있다고 자존심을 세운다 참 다행이다 작은 못 하나가 방안에서는 영정사진걸이가 되고 부엌에서는 냄비걸이가 되고 뒤안 벽에서는 삽걸이 호미걸이가 되다니 못의 위대한 힘이 꽃으로 피는 것이었다 [출처] 제3회 건설문학상 / 황보람, 정성수|작성자 k..

좋은 시 2022.11.15

서녘의, 책 /박기섭​​

서녘의, 책 /박기섭​ ​ ​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 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꽃이 한쪽에 낯익고도 낮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새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 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활먹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듯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좋은 시 2022.11.10

젓가락/최태랑

젓가락 최태랑 둘이 있어야 한 벌이 되는 젓가락 식탁 위를 휘젓고 다니는 저 날렵한 것들 누구와 짝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돌아다닌다 한 식당에 있으면서도 제짝을 모르고 산다 인연은 봄비처럼 왔다가 이별은 소나기처럼 간다 우연찮게 만나도 옛 기억을 모른다 수저통에 들어가면 모두가 한통속 둘이 같이 있을 때면 포개져서 울력을 한다 젓가락은 잡는 사람에게만 몸을 내준다 어떤 입에서 쪽쪽 빨리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입속을 드나든다 처녀 입에 들어갔던 것이 노인의 입속으로 들고 청년 입속에 들고 나던 것이 중년 여인 입속에 든다 일용직 노동자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생을 살다 간다 사이 최태랑 그 말 참 좋다 아직 오지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낀 무렵이란 말 까닭 없이 설레는 시간..

좋은 시 2022.10.11

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사는 게 파자마 같다 어디에 벗어두어도 상관없다 구겨지거나 늘어나거나 색이 바래면서 몸은 파자마에 길들여진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사는 것은, 사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여기저기 실밥이 터진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파자마를 새로 사왔다 파자마 속으로 퇴근하는 저녁이면 아내보다 파자마가 더 나의 체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두 번만 입어보면 안다 그는 형상기억합금 브래지어처럼 내 몸의 정보를 고스란히 모방한다 누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없이 살고 싶겠는가 파자마를 보면 투둑 가슴이 내려 앉는다 여기저기 생활의 솔기가 타지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내가 거기 있기에 무뎌짐도 익숙해지면 그뿐이란 걸 알기에

좋은 시 2022.10.06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 한옥순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 한옥순 이마트 앞에만 가도 왠지 주눅이 든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언젠가 체크무늬 가방을 스쳐가듯 본 적 있다 그 물건은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우아하고 거만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고 바보처럼 부스럭 소리도 못 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열등감을 가르쳤을까 아니다 타고난 본성이다 스스로 터득한 싸구려 본능이다 검고 질긴 비닐봉지의 태생이다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

좋은 시 2022.10.06

한 수 위 / 복효근

한 수 위 /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면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펜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허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좋은 시 2022.10.06

물들다/마경덕

물들다 /마경덕 자색 삶은 옥수수, 깡치도 자줏빛이다 뼛속까지 깃들었다. 어머니의 쓴 잔소리에 물들지 못한 아버지 날마다 술에 물들었다. 그동안 몸에 들이부은 삼학소주 됫병들, 학은 날개를 펴고 날았지만 아버지는 어두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술병에 노랗게 물들어 온몸이 가을 탱자 같았다. 한동안 노랑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아버지. 어머니가 매끼 끓여준 재첩국으로 간신히 황달에서 빠져나왔다. 다리 힘 빠지고 입이 지친 늘그막에 바짓 끝단과 치맛자락이 쬐끔 물드나 싶더니, 아버지 갑자기 세상 떠나셨다. 이제사 살만하다 싶더니 이게 뭔 일이냐고 서럽게 울던 어머니. 당최 안 맞아 못 살겠다고 진작 갈라서야 했다고 푸념하시더니 어느새 아버지에게 깊이 물들어 있었다. 지붕 /마경덕 창을 넘어오는 빗소리, 어둠에 ..

좋은 시 2022.09.20

빈집 / 박수봉

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

좋은 시 2022.09.09

징/박정원

징 박정원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감상] 징소리는 제 몸의 상처가 깊을수록 가슴속에서 길어 올린 소리로 멀리 퍼져나간다 상처 없이 완성되는 삶이 어디 있으랴 징채도 한 번 제대로 못잡고, 그렇다고 목청껏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붉은 징 같은 삶이 곧 서민들의 삶 아닐까 싶다 언젠가 가슴 한 복판에 명중하는 징소리를 꿈꾸며 오늘도 ..

좋은 시 2022.08.31

풍경의 깊이/김사인

풍경의 깊이/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 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

좋은 시 2022.08.28

필사적으로/김사인

비 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땀 배고,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 땅 한 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 던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희미한 옛벗들 그림자, 환등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에 우산, 또 한 손엔 내용불상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좋은 시 2022.08.28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김사인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김사인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눈 내리깐 채 몸의 제일 후미진 구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년 인류사를 배경으로 갖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림으로부터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에 이르는 유구한 상처의 넋들이 그 숨죽인 다소곳함 속에는 서려 있다고 보였다. 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

좋은 시 2022.08.22

서울의 부레옥잠/배한봉

서울의 부레옥잠 배한봉 서울 가서 보았다, 지난 여름 서울 인사동 가서 보았다 돌확에 담겨 보랏빛 꽃 피운 부레옥잠 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잎 찢어지고 더러는 꽃대 꺾인 채 아직도 살아 있다고 웃는 거 보았다 그때 나는, 차마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웃음을 울음보다 더 큰 비명을 들었다 잎 푸르지 않고 꽃 피우지 않으면 쓰레기일 뿐인 서울의 부레옥잠 인사동 휘돌아 나가며 그 길목 작은 공원에서 소주병 들고 킬킬거리는 또다른 부레옥잠도 보았다 뿌리 상할 대로 상한 노숙의 신음, 노숙의 악취 세상 홍수에 삶의 둑 붕괴된 인간부초들이 하오의 뜨거운 태양 빛에 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살고 싶지만 삶이란 때로, 얼마나 비정한 현실의 볼모인가 마른 잎은 마른 대로, 시든 꽃은 시든 대로 물 속..

좋은 시 2022.08.21

사과와 벌레의 함수관계 / 노기정

사과와 벌레의 함수관계 / 노기정 꼼지락거리는 저, 물컹한 것 속에는 대체 어떤 집요함이 있어 출구가 없는 여기까지 온 걸까 벌레가 사과 한 알을 먹어 치우기 위해선 치열하게 세상을 녹일 기세로 덤벼야 한다 뭉텅한 입은 심장을 겨냥하고 느려터진 발은 시간을 정조준 해야 한다 조용히, 고양이 발자국보다 더 숨죽이며 조금씩 오랫동안 전진해야 한다 식탁위에서 사과는 속수무책 쪼그라들어 이리저리 구르며 애물단지가 된다 이번 생은 벌레를 안고 늙어가는 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과도를 들이대다가 문득, 가슴 저린다 내 속에서 스멀대는 것들 한때 목숨처럼 나를 파먹던 기억이 헐렁해진 힘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좋은 시 2022.08.18

동피랑, 나비 마을/심강우

동피랑, 나비 마을 심강우 동쪽 벼랑에 나비가 사는 마을이 있다 물감이 떨어질 날 없는 화가가 채집한 단색의 애환만 있어도 좋을 한갓진 풍경 방방곡곡 나비가 참 많기도 하지만 뱃고동으로 첫 페이지 넘기는 강구안 색색의 날개가 장식한 화보집이다 나비들의 문패는 한 해 걸러 바뀐다 드난살이 골목이래도 하늘은 자란다 은륜이 달리고 피아노건반이 춤추고 구름을 예약한 고래가 휘파람을 부는 그곳은 날마다 꽃술의 축제 기간이다 나비의 더듬이에 들킨 울음기 한산도 수루에서 물어 온 언약을 해거름녘 다도해에 묻어 두었다 바늘만 한 설움도 벼랑 꼭대기에 서면 붉게 번져오는 눈먼 사랑이 거기 있다 출항하는 소리에 맞춰 비행을 시작하는 나비 어쩌면 황홀한 저 빛깔은 나비의 해묵은 구애 꽃떨기처럼 섬에서 섬으로 호를 긋는 배들..

좋은 시 2022.08.18

여름에 대한 시

남녁의 여름 헤르만 헤세 마로니에 꽃 저녁의 숲 잎 속에는 반달, 숲 속에는 우리 조용한 술꾼들- 밤의 미풍 속에서 우리의 술잔이 울린다 어두운 하늘로 우리의 술이 이글이글 탄다 우리 덧없는 꽃들이 여름 내내 작열한다 나를 마셔라, 사랑아! 아리따운 이여, 그대를 마시게 하라! 우리의 뜨거운 여름 햇불들로 우리는 연인들에게 여름밤의 노래를 부르라 신호한다 오 올빼미 울음, 오 어두운 밤의 심장 환한 협죽도 속 밤나방 너 우리는 작열한다 타들어 간다 형제여 서로의 속으로 신에 바쳐진 축복 받은 제물이다 울려라 삶의 노래여 죽음의 노래여 술잔이 울린다 우리의 시작이 활활 타오른다!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한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

좋은 시 2022.08.04

돌확 / 유강희

돌확 / 유강희 자식 일곱 뽑아낸 이제는 폐문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 오래된 돌확이 마당에 있네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이끼가 낀 돌확은 주름 같은 그늘을 또아리처럼 감고 있네 황학동 시장이나 고풍한 집 정원에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받아먹으며 뿌리를 내릴 생각도 않네 뿌리 대신 앉은 자리엔 쥐며느리들만 오글오글 세월처럼 모여 사네 하지만 지금 돌확 속엔 내가 싸릿재 저수지에서 잡아온 새끼 우렁 하나 돌젖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있네 돌젖에 눈물처럼 금이 가 있네

좋은 시 2022.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