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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김사인

에세이향기 2022. 8. 22. 14:33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김사인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눈 내리깐 채 몸의 제일 후미진 구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년 인류사를 배경으로 갖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림으로부터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에 이르는 유구한 상처의 넋들이 그 숨죽인 다소곳함 속에는 서려 있다고 보였다.

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을 조금 당기고 치맛자락을 끌어내려 슬며시 덮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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