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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젓가락/최태랑

에세이향기 2022. 10. 11. 08:53
 
젓가락
 
최태랑
 
둘이 있어야 한 벌이 되는 젓가락
식탁 위를 휘젓고 다니는 저 날렵한 것들
누구와 짝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돌아다닌다
한 식당에 있으면서도 제짝을 모르고 산다
인연은 봄비처럼 왔다가 이별은 소나기처럼 간다
우연찮게 만나도 옛 기억을 모른다
수저통에 들어가면 모두가 한통속
둘이 같이 있을 때면 포개져서 울력을 한다
젓가락은 잡는 사람에게만 몸을 내준다
어떤 입에서 쪽쪽 빨리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입속을 드나든다
처녀 입에 들어갔던 것이 노인의 입속으로 들고
청년 입속에 들고 나던 것이 중년 여인 입속에 든다
일용직 노동자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생을 살다 간다
 

                                                                                        


사이
 
최태랑
 
그 말 참 좋다
아직 오지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낀 무렵이란 말
까닭 없이 설레는 시간
떫지도 시지도 않는
그렇다고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닌
견고한 언어는 아니지만
잠깐 헛생각하다 지나쳐 버릴 것 같은
낮과 밤 사이
빗물 고인 돌확에는 벌써
개밥바라기 별이 내려와 있고
산그늘이 홑이불로 마을을 덮는 시간
집을 나갔던 연장들과 가축들이 돌아오는 저물녘
달빛 희미하게 문틈으로 들어와
빈방 벽에 묵화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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