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 한옥순
이마트 앞에만 가도 왠지 주눅이 든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언젠가 체크무늬 가방을 스쳐가듯 본 적 있다
그 물건은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우아하고 거만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고
바보처럼 부스럭 소리도 못 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열등감을 가르쳤을까
아니다 타고난 본성이다
스스로 터득한 싸구려 본능이다
검고 질긴 비닐봉지의 태생이다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도 녹지 않는다
미리부터 새까맣게 질려 태어난 이 몸뚱이로는
구멍 난 데로 한을 쏟아내는 일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고
꺼지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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