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사는 게 파자마 같다
어디에 벗어두어도 상관없다
구겨지거나 늘어나거나 색이 바래면서
몸은 파자마에 길들여진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사는 것은, 사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여기저기 실밥이 터진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파자마를 새로 사왔다
파자마 속으로 퇴근하는 저녁이면
아내보다 파자마가 더
나의 체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두 번만 입어보면 안다
그는 형상기억합금 브래지어처럼
내 몸의 정보를 고스란히 모방한다
누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없이 살고 싶겠는가
파자마를 보면
투둑
가슴이 내려 앉는다
여기저기 생활의 솔기가
타지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내가 거기 있기에
무뎌짐도 익숙해지면 그뿐이란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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