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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다/마경덕

에세이향기 2022. 9. 20. 16:43

물들다 /마경덕

 

 

   자색 삶은 옥수수, 깡치도 자줏빛이다 뼛속까지 깃들었다.

 

  어머니의 쓴 잔소리에 물들지 못한 아버지 날마다 술에 물들었다. 그동안 몸에 들이부은 삼학소주 됫병들, 학은 날개를 펴고 날았지만 아버지는 어두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술병에 노랗게 물들어 온몸이 가을 탱자 같았다. 한동안 노랑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아버지. 어머니가 매끼 끓여준 재첩국으로 간신히 황달에서 빠져나왔다.

 

  다리 힘 빠지고 입이 지친 늘그막에 바짓 끝단과 치맛자락이 쬐끔 물드나 싶더니,

 

  아버지 갑자기 세상 떠나셨다. 이제사 살만하다 싶더니 이게 뭔 일이냐고 서럽게 울던 어머니.

 

  당최 안 맞아 못 살겠다고 진작 갈라서야 했다고 푸념하시더니 어느새 아버지에게 깊이 물들어 있었다.

 

 

 

 


                                           

 

지붕 /마경덕

 

 

  창을 넘어오는 빗소리, 어둠에 숨은 밤비를 소리로 읽는다. 지붕 아래 누워 밤새 빗소리에 젖는 일은 단잠과 바꿔도 참 좋은 일

 

  모과나무 첫 태에 맺힌 시퍼런 모과 한 알, 서툰 어미가 두 손을 움켜쥐는 밤. 빗물에 고개가 무거운 옥상의 풋대추도 노랗게 물든 살구도 자다 깨어 빗물에 얼굴을 닦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뿌리째 뽑힌 텃밭 달개비도 기운 차려 보랏빛 꽃을 내밀겠다. 첩의 입술 같은 붉은 능소화는 길바닥에 속엣말을 흥건히 쏟아놓겠다.

 

  투둑투둑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비의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 사방으로 빗물 튀는 소리.

 

  피를 수혈받는 밤

 

  젖어야 사는 것들은 지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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