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공양/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술빵 냄새의 시간 - 김 은 주 |
||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믈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
허氏의 구둣방/이미화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수선 중인 구두는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고사목(枯死木)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 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1) | 2023.03.08 |
---|---|
소금벌레 / 박성우 (0) | 2023.03.08 |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신용목 (0) | 2023.03.05 |
거대한 밭/손음 (0) | 2023.02.28 |
소금의 밑바닥/ 이선희 (0) | 2023.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