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에서
최금진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다이얼을 돌린다
사내는 구인광고지처럼
저녁의 끄트머리에 서서 펄럭인다
우산대가 꺾인 사람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인다
손바닥 위엔 모종처럼 돋은 푸른 메모지 한장
사내는 있는 힘껏 비를 가리며 전화를 건다
동사무소 꼭대기엔 뭉툭 잘려진 입 하나, 커다란
스피커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낸 듯
안내방송한다. 모두들 일찍 귀가하시압!
아, 그렇습니까......네, 네, 사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려진 수화기처럼 웅크리고 돌아선다
손에서 구겨진 메모지가 무섭게 바닥에 달라붙는다
먹구름이 하늘을 두껍게 풀칠해놓고
사내의 이력서 위에 새로운 어둠을 발라놓는다
상가에 켜진 TV들은 눈을 깜빡이며
간단명료하게 이 저녁의 풍경을 정의한다
태풍북상, 그러니 모든 외출을 삼가시압!
사내는 젖은 비닐봉지처럼 굴러간다
바람을 품고 아주 높이 떠오르고 싶다,
사내는 잔뜩 부풀어오른 외투를 부러 채우지 않는다
뚜뚜뚜뚜, 잘린 말의 토막들이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그의 등을 어둠속에 타전한다 하늘에선
거대한 회전문 속으로 머리채를 잡힌 구름들이
뺑뺑이 돌고 있다, 진땀을 뺀다
저녁이 온통 다 젖는다
-최금진 시집 『새들의 역사』 중에서
[감상]
불안의 끝 모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상의 모든 외출을 방안에 잠궈놓는다.
하지만 젖은 봉지같은 후줄근한 사내,
이 시대의 소시민으로 대변되는 소외받은 이들에게
한 끼니의 생존보다 더 절박한 불안은 없다.
태풍이 몰려오는 골목길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풍찬노숙, 비를 맞으며
공중전화 부스에 갸냘픈 희망을 타전해 보지만
뚜뚜... 세상은 그를 아주 가볍게 생략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공범인지도 모른다.
태풍이 북상중이다.
젖은 비닐봉지는 날고,
그 저녁 사내가 남긴 잘린 말들이
아직도 이 시대의 젖은 골목을 아프게 배회하고 있다.
(양현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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