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 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 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2」
김승희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시는 상처의 꽃’이라는 말이 입에 돈다. 상처에서 피처럼 피어나는 꽃, 그것이 시라는 생각에 미친다. 우리는 가족, 사랑, 출산, 질병, 밥벌이, 이념,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에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생긴다. 매일 매일이 상처투성이다. 상처로부터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용수철’이 없다면 우리는 상처로 짓뭉그러져 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내장된 “상처의 용수철”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삶은 상처의 화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튕겨 오르는 힘, 솟구쳐 오르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새롭게 아침을 맞는다.
「솟구쳐 오르기」 연작시를 통해 “활활 타오르는 상처의 꽃에서 훨훨 날아가는 새의 날개의 푸드득 솟구쳐 오름”(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의 자서)을 찾아 어둡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삶 위로 튀어 오른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높이뛰기를 하듯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고(「솟구쳐 오르기 1」), 상처의 힘을 깨닫기 위해 긴 머리에 성냥불을 당기고 싶어 하고(「솟구쳐 오르기 3」), 상처의 혼 아니 혼 속에 간직한 상처의 오케스트라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 별들의 찬란한 음악을 듣기(「솟구쳐 오르기 10」)도 한다. 상처를 비상의 날개로 삼아 날아오르고자 한다.
그는 “시인은 천형을 앓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무당이 고통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자라면, 상처의 작두를 타고 상처의 작두 위에서 공중 부양을 하는 이가 시인일 것이다. 그 역시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과 더불어 1970년대 여성시의 새로운 솟구침을 주도한 시인으로 평가되며, 시쓰기 외에도 에세이, 평론, 소설, 동화, 논문, 번역 등 분출하는 글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도 상처에 내재한 자기 갱생 및 자기 정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봄은 겨울에서 솟구쳐 오른다. 파란 싹, 파아란 보리, 개구리, 빨간 넝쿨장미, 민들레, 나뭇가지의 새 눈의 몸을 빌려 솟아오른다. 땅속이나 바위 밑에서부터, 담벼락을 타고 시멘트를 뚫고, 텅 빈 허공을 일으키며 기어오른다. 떨어져야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내내 얼어 있던 것들이, 넘어져야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당겨져야 다시 줄어드는 고무줄처럼 내내 아팠던 것들이, 오늘도 ‘상처의 용수철’을 타고 튕겨 오른다. 내일도 스카이콩콩을 타고 날아오를 것이다.
아아 오오 우우! 기지개를 켜며 솟구쳐 오르는 탄성(彈性)의 탄성(歎聲) 소리 가득하다.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닥이여 바닥에서/ 무거운 사슬들이/ 짤랑짤랑 가벼운 빛의 음악이 되는 그날까지”(「무거움 가벼움 솟아오름」). <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정끝별, 민음사, 2018)’에서 옮겨 적음. (2022. 7.26. 화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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