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하나 묻어 두고
―이연희(1973∼ )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화자는 젊은 주부일 테다. 어쩌면 늙은 어머니가 담가 보냈을 그의 집 고추장이 냉장고에 있을 테다. 장독 항아리 같은 건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 화자가 화분 몇 개 놓여 있을 베란다에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장독대의 봄날’을 떠올린다.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에서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비로소, 사무치게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자의 마음이 시리고 아픈 것이다.
어머니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것 같았을 그 마음을 잘도 삭히셨군요. 썩히지 않고 삭혀서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게 먹이셨군요. 그렇게 우리 식구를 지키셨던 거군요.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이렇게 맵고 짠 건 덜 삭혀서일까요? 어머니와 딸은 용모와 표정뿐 아니라 성정도 닮을 테다. 고추장처럼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안온한 삶의 껍질이 갑자기 벗겨진 듯한 화자의 마음이 고즈넉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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