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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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빈집 / 이영옥

에세이향기 2021. 6. 16. 17:02

빈집 / 이영옥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 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 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 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 정지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집게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 홑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 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를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 나간 독 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조용조용 젖어 가는데
방문은 늘 해오던 일이라는 듯이
고단한 뼈들을 가지런히 윗목에 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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