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떼 /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삼나무는 어디로 둘 건지 궁금했다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흘러간 것들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 떼들은
평생을 키워온 짙은 그늘을 말없이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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