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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길/박용래

에세이향기 2021. 6. 16. 15:02

버드나무 길

 

박용래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紅顔의 少年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박용래(1925~1980)

 

 

꽃 한창 지나고 이제 연두가 밀립니다. 차례대로 오고 또 가는 빛깔들입니다. 겨우내 색이 그리웠던 산천의 부름을 받고 천천히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타나는 연두, 그다음은 초록의 무리가 좀 급한 듯 넘보겠지요.

버드나무의 치렁치렁한 자세에 돋아나는 연두는 단연 눈길을 끕니다. 바람이 지나면 휘어져서 부끄러운 고백의 자세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가셔졌던 연애의 감정을 불러냅니다. 그 질서를 그대로 따라가면 좋으련만 인간 만사 힘겹습니다. '맘 천근' '천근 맘'의 시름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 나서자는 길이 바로 '버드나무 길'입니다. 지난밤 비가 지나갔나 봅니다. 논 한쪽에 오랜만에 물이 고였습

니다. 아직 '완전 해갈'은 아니나 거기 '얼비치는' 인간사 밖의 이웃들이 좋습니다. '쑥부쟁이' '염소' '몇 점의 구름'이 '사는 일, 별거 아니야 잊어버려…' 그렇게 말합니다. '메까치'의 삶의 찬가가 놀랍습니다.

힘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갑니다. 그 풍경 그대로 마음에 들여서 가득 물 채워 놓으면 모여드는 빛들로 금세 큰 부자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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