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正傳
김현주
끝물을 수확한 오이 밭고랑에서 노각이 흔들흔들
술毒에 누렇게 쇤 할아버지를 끌고 가는
녹슨 자전거 바퀴가 흔들흔들
어젯밤 천둥번개에도 끄떡없던 노각이 쿵, 하고
누렇게 쇤 등짐을 아무렇게나 부려놓네
아이코, 이 웬수야! 비틀거리는 생의 주름살을
늦은 햇살이 잡아당겨 칭칭 감고 있네
어지러움 증처럼 천천히 되감기는 녹슨 바퀴살 사이로
망망한 갈증을 견디고 있는 노각의 굽은 등을 바라보네
헝클어진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흙 묻은 껍질을 벗기자
낡은 런닝 밑으로 쉰내 나는 땀방울이
물컹한 슬픔으로 만져지네
어둡고 험한 삶의 고랑을 더듬더듬 넘을 때마다
더러는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천천히 꺼내
휙, 내던지던 곳, 슬픔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기 한 뼘 허공에 머물기 위해
쿵, 하고
맨땅에 아무렇게나 누워 버린 추운 잠
다 이루었다며 노각이 부려놓은 허공이 붉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수/장석주 (0) | 2021.05.11 |
---|---|
잡탕밥/박수서 (0) | 2021.05.11 |
믹서/김영미 (0) | 2021.05.09 |
멸치, 명태에 대한 시 (0) | 2021.05.08 |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0) | 2021.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