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걸음/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올 한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호박범종
물앵두나무 우듬지에 늙은 호박 하나, 폭설 내내 새들이 다녀간다 툇마루에 앉아 겨우내 낯선 새 울음소리 듣는다 호박범종을 치는 새의 부리들
밤이 되면 쥐들이 눈밭에 떨어진 황금빛 종소리를 두 발로 받는다 퍼낼수록 고봉으로 담기는 바람소리, 홀가분해라 밥그릇범종이다 물앵두나무 우듬지가 하늘 한복판을 때린다 너무 커서 울리지 않는 하늘종, 맥놀이도 없다
땅바닥에 떨어진 호박껍데기는 녹슨 철모 같다 사람의 머리만 빼내면 철모도 종이다 녹슨 철모의 주인들이 새가 되어 날아왔나? 철모도 한 대 얻어맞은 영원한 이등병 지구가 초록 입술을 내민다
다시 구덩이를 판다 지구의 봄은 호박씨 하나 까는 일에 열중이다 하늘범종을 쪼아보자고 부리를 내미는 새순들, 비천도를 내걸어라 덩굴손이 곧 용튜(龍鈕)를 틀고 애호박종을 매달 것이다 불목하니 호박벌의 타종 분주할 것이다
이등병 군번줄처럼 밤하늘 종소리
엄니의 화법
추석 맞아
장발에 파마하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너는 농사도 안 짓는 애가
왜 검불은 이고 댕기냐? 하신다
글도 안되고
이리저리 마음 시려서 몇달 만에
머리 깎고 다시 찾았더니,
나라 경제가 어렵다 하드만, 그새
농사채 다 팔아먹었냐? 하신다
넉 달 전 말씀
어찌 기억하고 바깥쪽 댓구를 단다
배냇짓부터 가르쳐준 엄니와 말싸움 해봐야 뭐하나?
선산 쪽에다 혼잣말 던진다
엄니가 내 땅 다 훑어갔구먼
머리칼에 불두화 수북헌 거 보니께
뽑지도 않은 배추밭에 함박눈 내린다
하느님도 농사채 다 팔아잡쉈나?
그득그득 내려앉은 하늘 검불들
여우비
삼우제 마치자 장대비 쏟아진다
혼자 남은 아들이 무덤에 남색 비닐포장을 덮는다
채 가라앉지 않은 슬픔에게 농을 친다
-저승길에 한복 입혀드리냐? 쪽빛이 겁다야
-평생 머릿수건 벗으실 날 없었는디,
자식이란 놈이 또 씌워드린다야
-아저씨 옆에 나란히 누우니께 젖무덤 같다야
그러고 본께 한복이 아니라 부라자다야
-치매 걸린 니네 할머니는
머리에다 부자라 쓰고 댕기냐?
하기야, 돌아가시고야 처음으로 부라자 찬다야
거시기 끈을 맞잡고 실라이 벌이는 사이
먹구름 속 햇살이 배시시 엿본다
허공의 알종아리에 핏줄 돋는다
황토무덤에서 나누는 입 근지러운 것들의 싸한 마음을
적시겠단 건가? 말리겠단 건가?
여우비 내린다
역전쌀상회
문패가 셋이나 걸려 있죠 마지막 문패 속 이름도 이태 전에 떠났어요 쌀가마닐 지다 삐끗한 허리를 저승까지 더려간 거죠 이제 할머니 혼자 알전구 밝히고 있죠 삼십촉이면 쌀보리도 팔순의 허벅지도 눈부시게 빛이 나죠
쌀집 앞 은행나무만 소갈이 났나요 리어카 묶여 있는 앉은뱅이 은행나무만 쇠사슬을 흔들며 투덜거리죠 가만 생각해보면, 그 은행나무 참 기특하죠 저 혼자 불쑥불쑥 가지를 늘이면 삼십촉으론 어림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굴속같이 어두우면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을 어찌 보겠어요 그런데, 그 은행나무가 기지개를 못 켜는 까닭이 또 있죠 키질할 때마다 뛰쳐나온 쭉정이들이 은행나무의 발등에다 뿌리를 내린 거죠 그 어떤 가로수가 제 작은 밥그릇에 들깨를 들이고 보리 이삭을 패게 할 수 있겠어요 머리 꼭대기에 주렁주렁 강낭콩 비녀를 꽂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시내 일만 이천 은행나무들이 구린내를 쏴대는데 그 눈칫밥 받아먹으며 어떻게 키를 늘일 수 있겠어요 가지가 굵어지면 어찌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할아버지의 새벽 천식, 그 기차소리 너머로 손차양을 할 수 있겠어요
잠깐, 저곳 좀 보세요 펑크난 리어카가 낑낑거리며 쌀집으로 들어가네요 햅쌀 세 가마니가 평당 천만원이 넘는 깔판 위에 몸 부리네요 쌀가마니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 저 거친 손바닥 아래에다 세상 잔머리들 다 들이밀면 좋겠어요 강낭콩이며 작두콩, 친친 감긴 식구들과 함께 한번 들르시죠 찔레꽃러럼 환하게 저기 저 쌀집에서 다시 첫걸음 내딛자고요
눈을 비빈다는 것
첫나들이 나온
아기 참새들에게, 흩어지지도
저 혼자 날아가지도 말라고
어미가 다짐받고 있네요
한참 만에 어미 참새가
벌레 한 마릴 몰고 왔어요
막막한 세상으로 아기들이
다 날아가버렸는데 말이에요
다섯 마리 가운데 무녀리 한 마리
녀석의 마지막 끼니가 악물려 있네요
어미의 벙어리울음을
벌레의 솜털이 다 받아내고 있어요
하늘을 날아온 저 벌레의 집에도
남은 식구들의 목멤이 있겠지요
일파만파, 세상을 조여오는 그 몸부림이
어미새의 젖은 눈길과 만나면 회오리가 일겠지요
삼킬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는
슬픈 실타래, 허공에 가득할 테니
눈을 비비는 거겠지요
그댈 만나러 갈 때마다
참새처럼 작아지는 거겠지요
눈꺼풀이 떨리는 거겠지요
이웃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할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맛볼라치면
버스타고 장터까지 갔다 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목숨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 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콧물의 힘
느릅나무 향나무 노간주나무, 그 어떤 무쇠나무로 코뚜렐 만든다 해도 소 콧구멍에 주소를 둔 놈이라야 힘을 쓰는 겨
헛간 말쿠지에 몇해째 걸려만 있는 코뚜레는 지 몸 휘어잡고 있는 지푸라기 한 올도 끊던 못혀
쇠전에 끌려나온 목매기송아지처럼, 오늘은 맘껏 울어 눈물 콧물에서 용쓰는 힘이 나오는 것인께
워쩔껴? 인연이란 게 다 코가 꿰인 울음보인 것을 여덟 팔자 반토막 콧물 전 코뚜레인 것을
엄니의 남자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을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전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련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치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불주사
네 왼어깨에 있는 절이다
절벽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느냐만
엄니는 줄 한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로 됐다고
등목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 해서
한번 더 맞히려 했는데 세번째는 들켰단다
크는 흉터는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끈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드려도
자식 몸 버려놓은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 아닌가
네 왼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 마당 탑신이 아니겠는가
네 왼어깨엔 엄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 하면
물구나무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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