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에세이향기 2021. 5. 4. 12:20

<1>-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길쯤이 얼어붙은 강위로

아버지의 구식 자전거는 오래된 충복처럼

삐거덕거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왔다

오십천 왜가리는 얼음에 발을 심고 한나절을 버텼다

미루나무가 달랑거리는 귀 한 짝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하나같이 바람의 갈기를 붙잡고 떠돌다가

이제 막 황량한 겨울 풍경 앞에 뱉어진 꼴이었다

하교 길에 영덕대교아래에 사는 거지들의 따듯한 저녁을

나는 가끔 훔쳐보았고 청솔가지 태운 연기가

흰 뱀처럼 몸을 비틀며 붉은 강을 건너왔다

한 방향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방향들이 살고 있었는지

바람이 삶 전체를 뒤로 밀었다가 제자리에 세우면

강바닥에는 어지러운 손금들이 자꾸 태어났다

모두가 하룻밤만 자고나면 떠날 객식구처럼

바람이 뱉어낸 싸락눈처럼

발 없는 귀신처럼 서늘하게 집안을 떠돌았고

나는 백열등 소켓까지 키가 닿지 않았던 아홉 살,

깜깜한 날들이 블라인드처럼 가지런히 접혀 갔다

내 앞에 놓인 강을 어떻게든 건너려했던 시절이었다

 

<2>-나를 찢고 달아나는 붉은 달-개기월식/이영옥-

 

깜깜하게 저물어 버린 등 뒤에서

너는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구나

기운채로 오래 달려 왔었구나

세상은 돌아오는 힘으로 철새를 부리고

눈썹만한 달을 키워 깜깜한 우주를 밝히기도 하지

수심처럼 검은 웅덩이를 이마에 묻고

조금씩 내게로 몸을 밀어 붙이는 것은

한 몸이 다른 한 몸을 기다리는 어떤 끌림 때문이지

그리고 몸과 몸이 완전하게 겹쳐졌을 때

우리는 아득하게 어두워질 수 있었지

바로 그때 달은 떠오르고

추억은 견딜만한 고도에서

가장 멀리까지 올 수 있는 기억을 몰아

일직선위에 나란하게 줄을 세우지

망각은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속도를 내지

그러다 너는 맑은 꼬리를 흔들며 지구 뒤편으로 사라지지

눈이 붉어진 둥그런 달을 보며

우리는 또 한 번의 세상을 건너가고 있지

 

<3>-돼지/이영옥-

 

 

1.

돼지를 키우자고 제안한 것은 아버지였다 패배와 성공은 간발의 차이로 왔다 뒷마당에 어설픈 축사를 짓고 아버지는 까만 돼지 열두 마리를 사왔다 목구조상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를 키워 다시 푸른 하늘을 보겠다는 아버지의 오기였다 돼지가 적응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가족들은 돼지우리 냄새 때문에 얼굴이 노랗게 변해갔다 자전거에 구정물을 싣고 온 아버지는 돼지들이 새끼 칠 웃음을 미리 입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돼지에게 어떤 호의도 가지지 못한 형제들은 서로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2.

발정 난 암퇘지가 교배를 하고 왔다 태어나 처음 식사를 거부한 돼지는 하나의 기쁨을 알게 된 대신에 몇 개의 고통을 달고 왔다 흰 눈이 펑펑 오던 저녁에 발정기의 수퇘지는 오로지 먹고 살찌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거세를 당했다 수컷과 암컷이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아버지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의 경제력은 그게 아니었다 그땐 사랑 보다 절박한 것이 먹고 사는 일이었다 돼지는 밥을 들어오자 아픔을 잊고 밥통에 코를 박았다 정말 돼지처럼 불쌍한 놈들이었다 본능에 최선을 다하는 동물 중에 돼지만한 게 없다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죽은 뒤에도 상 위에서 헤벌쭉 웃고 있지 않는가

 

3.

손전등이 몇 번인가 하얗게 까무러쳤다 새끼돼지 열 마리가 고물거리는 어둠처럼 축사를 채웠다 아버지가 성공이라는 신화를 탄생시킨 순간이기도 했다 어미돼지는 벌러덩 드러누워 분홍빛 젖꼭지를 빈틈없이 물렸다 그 힘으로 우리는 허연 비계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지만 거세당한 돼지의 비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의 엉덩이에는 상처같은 보랏빛 도장이 선연하게 찍혀있었다

 

<4>-능소화 붉은 입술로/이영옥-

 

 

여기가 세상의 막다른 곳인가

뼈와 살 밖으로 흘러나온 줄기 끝에

능소화 소스라치게 피어있다

울컥울컥 토해 낸 피 빛 상처들

폭염의 고요를 한 겹 벗겨내면

밤새 복 받치게 운 것 같은

발그레한 네 눈동자 마주치고

타닥타닥 숯불처럼 피어올랐던 마음

한꺼번에 후욱 꺼뜨리며

뜨겁게 단 살 내음 식히려는지

소나기에 긴 머리를 풀어 헤치는 꽃,

세상의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은

아득한 허방아래 모두 죽어있고

생의 전부를 던져 너는 죽음을 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누워있던 너는

독약이 온 몸에 퍼지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붉은 살점을 떠 매고 여름의 끝으로 갔다

 

<5>-어디쯤 왔을까/이영옥-

 

 

북천 내* 건너온 바람이 대문을 흔든다

아버지의 귀가는 늦어지고

어머니가 막내 동생 머리를 긁어보라고 한다

어디쯤 오고 있는지

뒤통수쯤 인지, 앞이마쯤 인지

마음이 마음을 짚어낼 수 있는지

대문을 찌걱이다 돌아가는

바람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는 휑한 그믐

아랫목에 묻어둔 밥주발이 몇 번이나 넘어졌다

하품이 잦던 막내도 애저녁에 잠들고

불안을 문풍지처럼 울려 둔 방안에서

한 땀 한 땀 이불 호청을 꿰매는 어머니는

밤을 연탄재처럼 하얗게 태우는데

안강들에서 출발한 주먹 눈이 창문을 퍽퍽쳤다

눈썹위에 눈을 얹은 아버지는 어디쯤 왔을까

초저녁부터 밝혀둔 기다림의 심지를 한 칸 올리고

이제나 저제나 예감으로 이어지는 캄캄한 겨울 밤

오늘도 샤륵 샤륵 흰 눈이 오고있다

 

*북천내: 경주 북쪽으로 흐르는 천

 

<6>-동지 무렵의 검거나 새하얗던/이영옥-

 

 

어머니가 부뚜막에 앉아 팥죽 솥을 젓고 있다

밤눈은 벌써 솥 안에서 휘몰아쳤고

빨랫줄에 걸린 연기가 서걱서걱 얼어갔다

잡았던 손을 놓친 문고리가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아버지는 아랫목에 술 단지처럼 묻혀 부글부글 익어가고

어머니의 가슴에 빠진 수많은 달들은

무쇠솥 위로 떠올랐다

날개를 접은 검은 하늘이 뒤란으로 내려 와 웅크렸다

할머니가 뿜어대는 독한 담배연기에

어머니의 강건했던 주기도문이 쿨럭 쿨럭 기침을 했고

방안은 가마솥 안의 물집처럼 북적북적 끓어올랐다

 

박쥐가 가슴을 펴고 나는 것은

제 캄캄한 외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그렇지만 어머니

모두를 보여준다고 외로움이 없어지진 않아요

그건 살아있는 한 식량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에요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꺼운 성경책의 이빨을 앙 물리고 예배당으로 갔다

펑펑 내리는 흰 눈 뒤로

검은 밤이 가죽 표지처럼 둘러섰다

할머니가 팥죽 양푼을 화롯불에 올리자

할 말을 참고 있던 흰 눈깔들이 희번덕거렸다

우리는 시끄러운 눈깔들을 맛있게 파먹었다

다 먹은 빈 양푼이 팥죽 같은 땀을 흘렸다

무엇이든 푹푹 지워버린 세상이 깨끗한 척했다

솜버선을 두툼하게 신은 집이 바람에 떠밀릴 것 같았다

 

<7>-낮달이 꺼내는 새떼―흰 접시꽃/이영옥-



접시꽃이 엎지른 그림자에 금이 가는 구월
낮달은 가슴을 열고 까만 새떼를 자꾸 꺼낸다
그리움을 보태거나 덜어내며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오던 접시들은
꽃이 일생 동안 하나씩 공들여 빚어 온 것,
찬바람이 허공에서 하얀 접시 여러 개를 깨트렸다
새떼가 사분거리는 흰 빛을 물고 사라져도
꽃은 이듬해 새 접시를 들여 똑같은 상처를 담아 둘 것이다
꽃 지고 꽃대만 남았다는 건
허술히 담겨 있던 그리움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내 슬픔을 떠받쳐준 것을 새들이 물고 간 것과 같다
빈 꽃이 무게를 기억하는 것도
꽃대가 접시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저들이 잘 낫지 않는 환상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새떼가 석양을 꾹 찍고 빠른 등기 우편으로 날아갔다
말갛게 씻긴 허공 아래 헛헛하게 서 있는 꽃대들
가진 접시가 없어 아무것도 담아 둘 수가 없다
나는 꽃 필 때부터 깨질 것을 염려했어야 옳았다

 

<8>-소금쟁이/이영옥-

 

 

단단한 막을 친 나는 아무것도 껴안지 못하지

뒤돌아 앉은 당신의 어깨 파르르 흔들어 보았지

물결은 둥글게 다른 곳으로 번져갔지

 

당신의 집 속에 발가락 한 개 들이지 못하지

 

죽음보다 가볍게 당신을 맴돌았지

내가 만든 소란은 한없이 적막했지

제자리를 맴돌다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내가 만든 고독을 만나지

하루에도 수만 킬로 너에게로 달려갔지만

그길은 마음으로 들어서는 길이 아니라서

닿을 수 없는 거리만 늘이는 거지

풍덩풍덩 연못속으로 돌을 던지면

내 마음만 쩍쩍 금이가지

너를 가두려고 만든 감옥 안에

내가 갇히고 말지

 

수없이 만들어 놓은 파문도 다시 반듯해지는

너는 내가 들 수 없는 커다란 거울이지

 

무심한 너의 영혼위에 가볍게 떠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났다가 되돌아오고 마는

한 발을 너에게 빠뜨린 나는 절름발이 바람이지

 

<9>-달밤/이영옥-

 

 

그 곳으로

노을이 빛을 몰아갔습니다

새들이 줄 지어 날아갔습니다

때마침 나는 밤길을 캄캄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나를 앞질러가는 내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나와 연결된 조용한 나

발바닥이 붙은 샴쌍둥이처럼

서로의 생각이 들키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나를 빠져나와 성큼 앞장 서는 나

나를 위해 한 사람을 보내준 이는 누구입니까

짐작할 수 없는 무한 공중에

오늘 밤 당신은 희미한 달로 웃고 있습니다

침을 발라 뚫어놓은 문구멍 같은 달

당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훔쳐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당신이

커다란 단지에 달빛 찰랑거리게 채웠습니까

환한 그리움 한 동이 들이 붓고서

나무들 까만 귀를 쫑긋이 세웠습니까

 

<10>-브라스밴드가 지나간 뒤/이영옥-

 

 

브라스밴드 소리는 언제나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지요

길가의 코스모스는 벌써 귀를 열어 두었고

아름다운 행진곡이 가슴을 치고 날아간 곳은

언제나 서러운 가을 하늘이었지요

 

귀를 열고 있었던

모든 이들의 넋을 데려가 버린 자리에는

먼지의 긴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심벌즈의 저음에 붙들린 구두코가 검정 돌처럼 박혀 있었지요

 

브라스 밴드가 지나가고 나면 누구나 다 혼자가 되었지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삶의 전부를 흔들고 가는 이미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강물위에 줄 맞춰가는 새끼오리처럼

줄을 이탈 할 수 없어서

코스모스는 바람에 제 머리를 쿵쿵 찧으며

 

아코디언의 아가미처럼 가만히 닫히던 저녁

무덤 같은 시간위에 어둠이 조각조각 흩어졌지요

그래도 끝까지 기다림이 필요했던 것은

훌쩍이며 돌아 온 먼지 묻은 얼굴을 끌어당겨

목에 수건을 둘러주며 낯 씻기는 일이지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알아듣게 해주는 거지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세상에 늘린

아름답고 웅장한 허깨비의 짓 이라고

누구나 한번은 따라갔다 오지만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그냥 제자리라고

 

그 후에도

빈 강당에서는 브라스밴드의 연습은 계속되었고

아직도 어리둥절한 오리들은 갈퀴로 물을 밀어내며

간신히 제자리 붙들고 있는 거지요

까만 주둥이를 꽉꽉 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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