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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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단단한 고요/김선우

에세이향기 2021. 5. 5. 03:58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곤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마른 잎사귀에 숨어 있던 도토리로 시작해서 단단한 도토리묵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의인화와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산문시인데도 천천히 읽으면 랩 라임처럼 "~하는 소리"로 끝나며 운율이 있다. 시인의 이러한 개성적 인식은 독특한 시상 전개와 표현 방식에 "~하는 소리"의 산문적 리듬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끊어 읽기의 호흡을 통해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고 있다. 어디서 봄 직한 표현기법이나 어투는 시의 낯설기에 실패한 경우다. 물론, 시를 쓸 때마다 낯설기 방식으로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물을 한 가지 방향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시에서는 "도토리묵"의 일반적인 식감(食感)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상황을 소리로 "도토리묵"을 표현하고 있다. 다르게 보기, 바꿔 보기, 뒤집어 보기, 되어 보기,
또 뭐가 있을까?   (임정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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