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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라면/권선희

에세이향기 2021. 5. 28. 15:42

 

라면

 

권선희

 

 

하루가 퉁퉁 불어터졌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에 찬밥 한 덩이 미련 없이 던져 넣는 어머니. 푹푹 개죽처럼 끓어 가난이 쟁반 위로 오르면 우리들의 그 절제된 여인은 오목한 국자로 침묵을 퍼올렸다. ‘살자’는 두 글자가 길게 올랐다가 그릇에 담겼다. 주둥이를 내밀고 당겨 앉아 도대체 얼만큼 살아야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ㅡ출처 : 시집『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

ㅡ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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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맛있게 끓여 먹는 라면은

고급스레 끓일 수 있다

여럿이 먹어야 하고 먹어도 부족한 라면이면

게다가 찬밥 한 덩이 넣은 라면은

보나마나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

절제된 엄마의 국자 놀림은 냉정하다

라면 가닥은 몇 안 되고

푹 퍼진 밥에 몇 가닥의 라면이 고작이었을 터다

가난했던 시절의 넋두리다

제대로 된 라면 먹는 게 소원인데

얼마만큼 살아야 먹을 수 있는지

전제적인 물음에 슬픔마저 스며든다

그래도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기만 하다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밥 비벼서

둘러앉아 순서대로 한 숟갈씩 퍼먹던

그때가, 배는 고팠어도 행복했다

허기진 배 채우는 것이 희망이었으니까

이제는 먹을 만큼만 먹지만

아프리카 아이들 눈빛 사진만 봐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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