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권선희
하루가 퉁퉁 불어터졌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에 찬밥 한 덩이 미련 없이 던져 넣는 어머니. 푹푹 개죽처럼 끓어 가난이 쟁반 위로 오르면 우리들의 그 절제된 여인은 오목한 국자로 침묵을 퍼올렸다. ‘살자’는 두 글자가 길게 올랐다가 그릇에 담겼다. 주둥이를 내밀고 당겨 앉아 도대체 얼만큼 살아야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ㅡ출처 : 시집『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
ㅡ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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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맛있게 끓여 먹는 라면은
고급스레 끓일 수 있다
여럿이 먹어야 하고 먹어도 부족한 라면이면
게다가 찬밥 한 덩이 넣은 라면은
보나마나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
절제된 엄마의 국자 놀림은 냉정하다
라면 가닥은 몇 안 되고
푹 퍼진 밥에 몇 가닥의 라면이 고작이었을 터다
가난했던 시절의 넋두리다
제대로 된 라면 먹는 게 소원인데
얼마만큼 살아야 먹을 수 있는지
전제적인 물음에 슬픔마저 스며든다
그래도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기만 하다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밥 비벼서
둘러앉아 순서대로 한 숟갈씩 퍼먹던
그때가, 배는 고팠어도 행복했다
허기진 배 채우는 것이 희망이었으니까
이제는 먹을 만큼만 먹지만
아프리카 아이들 눈빛 사진만 봐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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