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사발
-길상호(1973~ )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조용조용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 마당 한구석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사발은 위가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고 줄금이 나 있다. 그 그릇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빗방울이 똑, 똑, 똑, 떨어지자 사발이둥근 입을 벌려 그것을 받는다. 빗방울을 받아 다시 소리가 생겨나고 점차 물결이 생겨나고 연꽃 봉오리가 벙글어 향기가 돈다. 심지어 빈집이 그 사발에 입을 대고 괸 봄비를 마셔 곯은 배를 채운다.
빗방울로 인해서 이 폐옥(廢屋)의 사물들은 깨어나고 그 혈색에 한결 생기가 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말라 있던빈집이 사발의 빗물을 스스로 들이켠다는 상상력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시인 엘리엇(T S Eliot)이 쓴 시의 구절처럼 봄비는생명이 잠들어 있는, 메마른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입력 : 가슴으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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