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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씨앗/김명수

에세이향기 2021. 5. 19. 18:32

소리 씨앗

 

김명수

 

늙은 호박 하나, 한아름이다
덤불이 메마르자 형상이 드러났다
누런 겉껍질 흉터도 있다
소리는 어떻게 숙어졌나
목젖 떨림이 잦아지면서
가랑비에 소나기 스며 있다

천둥 번개도 잠재웠으리라
구린내도 오랫동안 품어왔으니
그렇다면 구린내도 소리가 되고
한줄기 소변도 시원하리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들었다
소리는 이제 없고 소리 씨앗만
주름진 흉중에 품고 있어라

―김명수(1945~ )

 

서 있는 나무들, 언덕을 기던 넝쿨들, 파랗던 풀잎들 모두 시들어 갑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지났으니 식물들의 한해살이는 그쳤습니다. 울타리 너머 덤불이 시들자 한아름이나 되는 호박 하나가 반가운 손님처럼 와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은 듯이 한 생을 완성한 모습에 흉터와 주름이 없을 리 없습니다. 문득 늙은 호박이 숨어서 들었을 소리들은 어떻게 갈무리했을까 궁금합니다. 그 언덕을 지나던 수많은 소리들, 천둥 번개의 환란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도 늙어지 면 목소리가 가랑비 같아집니다. 그 안에 젊은 날의 소나기 소리도 스며 있는 것이지요. 그 주름들에서 소나기를 떠올려 봅니다.

보는 이 없을 것 같아 실례했던 인간의 구린내며 소변 소리마저도 다 '흉중에 품어' 한 넉넉한 결실이 되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호박 하나 덩그러니 놓인 풍경에서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듣는' 한 은일자(隱逸者)의 얼굴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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