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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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빈집/마경덕

에세이향기 2021. 5. 17. 15:22

 

 

빈집

 

 

마경덕

 

 

비 냄새 질펀한 들머리판, 나락냄새 풋풋합니다. 가도 가도 초록뿐, 모곡리 들녘이 몸을 뒤척입니다. 길은 어디론가 구불구불 기어가고 길섶엔 살진 호박이 배꼽을 내놓고 누웠습니다. 호젓한 아침, 길이 일러주는 대로 한서초등학교를 지나 밤벌 유원지를 돌아 나올 때 물안개는 산허리를 자르고 서서히 마을을 삼키고 있었지요.

 

간간이 만나는 빈집, 얼마나 적막한지요. 빈집 앞에 똘배 한 그루 어깨가 축 늘어져 있습니다. 꾀죄죄한 몰골로 예닐곱 개 남은 똘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돌덩이처럼 식은 똘배가 발아래 어지럽습니다. 거뭇거뭇 낙과가 비에 타들어갑니다.

 

가도 가도 빈집, 빈집입니다. 흙벽이 무너지고, 앞마당 녹슨 자전거가 외롭습니다. 우물이 마르고 문짝이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꼍 잎이 푸른 감나무, 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는 오래오래 혼자였던 모양입니다.

 

찰칵, 풍경을 오립니다. 마을 어귀 늙은 느티나무 긴 수염을 만지며 서 있습니다. 느티나무 건너 새로 지은 모텔에는 개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건너편 늪지엔 부들이 무리 지어 피었습니다. 곧 사람들이 몰리겠지요. 이젠 느티나무도 심하게 기침을 하겠습니다.

 

풍경에 취해 멀리 왔습니다. 길에서 길을 물었더니. 버스를 기다리던 중년부부가 되묻습니다.

"아- 그 외딴집이요?"

외딴집. 얼마 만에 듣는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하룻밤 묵은 곳이 외딴집이었습니다. 첩첩산이 불쑥 창문을 밀고 들어서던 그림 같은 집. 대문 대신 목책이 둘러진 그곳엔 시베리안 허스키와 백구 몇 마리가 먼저 달려 나왔지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모곡리의 풍경이 다 몰렸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집니다. '외딴집'하고 부르니 그리움이 그득 입안에 고입니다.

 

 

2003년 초여름 홍천 '김려옥' 시인댁에 다녀와서

[출처] 빈집 / 마경덕 (다시 보기)|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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