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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연필로 쓰기/정진규

에세이향기 2021. 5. 15. 03:29

연필로 쓰기/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잘못 쓴 글씨를 지우듯 우리의 생애도 지우고 고쳐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못 간 길을 서로 지워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떳떳했던 길마저 지워진대도 섭섭해하지 말고, 그것도 얼마든지 지워질 수 있는 것이라 여기며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허물 많은 삶에 대한 용서와 사랑, 향그런 영혼의 냄새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문학집배원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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