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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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주걱/박은형

에세이향기 2024. 7. 22. 04:23

주걱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

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

고봉밥 한 그릇

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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