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 / 권수진
거친 난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과장된 허세가 필요했다
덩치를 최대한 크게 부풀려서
얕잡아보는 상대의 기를 눌러야만
함부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집을 살 때는 대출한도를 늘려서
가능한 평수를 최대한 넓히고
최소 중형차 이상은 몰고 다녀야만
파도치는 풍랑에 맞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었다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명품으로 치장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소문난 맛집에서 인증샷을 누르고
유명 로고가 박힌 옷을 걸치고
명품 가방 정도는 들고 다녀야만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안된다면
독기라도 품고 살아야 했다
험한 세상에 맞서 죽기 살기로 부딪치며
잔뜩 오른 독을 내뿜다 보면
혼자라도 건들만한 놈이 없었다
시류에 휩쓸려 무리를 이루며 살든,
나 홀로 떠돌며 살든,
맨정신으로 사는 세상은 아니었다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눈 덮인 진부령 고갯길 너머 용대리 황태마을
덕장 안 명태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매달려 있다
시베리아 북서풍에 맞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아가리 크게 벌려 목청을 가다듬는 명태 두름
매서운 바람이 누르는 건반 소리에 박자를 맞춰
허공을 향해 일제히 트위스트 춤을 춘다
추위를 즐기는 명태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살아가는 힘겨운 세상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이 되고 싶었다던 아버지
우리는 그의 몸뚱이를 발기발기 찢어서
뜨거운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물을 훌훌 마시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덕장 건조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런 빛깔로 맛깔스레 익어가는 아버지가 걸려 있다
몸피를 잃을수록 구수한 맛이 베어나는 황태처럼
젊은 날 자식들 위해 오장육부를 다 뜯어내고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 비쩍비쩍 말라가는 몸
곤히 잠든 아버지의 퇴화된 지느러미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아버지 오늘도 동해의 거친 물살을 가로지르며
마음껏 바다를 유영하던 시절의 꿈을 꾼다
각촉부시 / 권수진
귀법사 승방 문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정좌해 앉은 학자들 어깨 너머로
스멀스멀 긴장감 맴도는 방안
촛대 위에 세워진 양초에 눈금을 긋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한데 모여
제 이름 석 자 걸고 시를 수창(酬唱)하는
불타는 학구열, 촛불이 활활 타오른다
방 주위를 빼곡히 둘러앉은 선비들은 마치
어둠 속을 불 밝히는 등불 같았다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국을 걱정하거나
법고창신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저마다 벼루 속에 청운의 부푼 꿈을 곱게 갈아서
마음껏 붓을 휘갈기는 생도들
진퇴의 절도와 장유의 서열이 분명하였으므로
몇 순배 술잔이 돌고 돌아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관료들은 무고한
백성을 유린하고 능욕하며
온갖 사치와 낭비가 극에 달했으니
청렴과 검소함을 각자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온몸을 장식하여라.*
문장으로 부귀(錦繡)를 누리고,
덕행으로 공명(珪璋)을 이루어라.**
오직 출세를 목적으로 과거 시험에 매진하는
어리석은 자를 향한 훈계 귓가에 맴도는데
스승님 말씀 받들어 구재학당에는
숨은 인재가 끊이질 않고
청렴결백한 관료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니
날마다 청명한 새소리가 영원하여라
* 계이자시에서 인용 ** 계이자시에서 인용
잠자는 청어 / 권수진
우리 집 안방에 청어 한 마리 반듯하게 누워 있다
백내장 시술 놓친 동태눈을 감은 채
아가미 대신 반쯤 벌린 입으로 숨을 쉰다
해감내 진동하는 어시장 좌판 위에서
살아 펄떡이는 싱싱한 활어들을 다듬던 여자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던 시절을 꿈꾸는지
곤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우리는 그녀의 살점을 발라먹고 자랐지만
늘 가시 많은 가난을 불평했을 뿐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녀를 감싸주지 못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파라솔 펼쳐진 고무대야 속을 헤집으며
행상인 북적이는 거리를 파수병처럼 지키던 여자
온종일 노동에 지쳐 골병들어도
병원비 아끼느라 파스만 붙이고 산다
바다에서 육지로 시집온 이후부터
등 푸른 줄무늬 선명하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 몸에선 생선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도마 위 칼질이 난무하는 험한 세상 속에서
토막토막 나버린 그녀의 상처를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한평생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자갈치아지매로 거친 삶을 살아야 했던
파도를 짊어진 고달픈 인생이 저물고 있다
낙타 / 권수진
어느 날 문득 세상이 황량하다고 느껴질 때
내가 건너야 할 길이 사막인 걸 알았다
황사가 지나간 자리마다 끝없이 펼쳐진 물결무늬 모래톱
카라반 행렬 속에 짐을 얹고 걷는 동안
지친 내 발걸음이 백년처럼 길었다
어두운 밤, 남천 끝자락에 총총한 전갈자리
한껏 맹독성의 오기를 품고 살지 않으면
삭막한 이 도시는 그 무엇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눈빛은 강렬하고 뜨거웠으나
차가운 별빛아래 얼어붙은 내 심장을 도려내진 못했다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층층이 쌓아 올린
바람만 불어도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꿈
굴곡진 내 삶은 늘 2%의 물이 부족했다
비에 굶주린 광야 한 가운데 내팽개친
목마른 영혼들이 안식을 취할 곳은 어디인가
모래알과 모래뿐인 사구를 넘는 동안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멍에가 혹이란 걸 알았다
아무도 찾지 않고 그늘 한 점 허락지 않는
사하라, 나미프, 룹알할리, 타클라마칸
저 멀리 신기루 한줌을 움켜 쥔 내가 보인다
오아시스처럼 맑은 눈을 가진
낙타의 눈망울 속에 비친 푸른 하늘이 흐렸다
활어회 / 권수진
바다로부터 추방된 물고기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구속 중인 수족관
불특정 순서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마에서 참수형이 집행되는 곳
뜰채에 포획된 감성돔 한 마리가
휘둥그레 눈을 뜬 채
허공 속을 파닥인다
쓱쓱 횟집 주인이 칼 가는 소리에
억울한 누명을 호소하듯
입을 뻐끔거리는 항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이 채 끝나기 전에
칼등으로 내리꽂힌 정수리에서
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횟감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비늘로 무장한 가죽을 벗길 때마다
소스라치게 전율하는
저 몸짓!
시퍼런 칼날이 회백색 배를 갈라 내장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니
자신은 무고인 양
좌우로 꼬리치는 지느러미
아직도 못다 한 증언이 남았는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유영하던
옛 시절을 기억하는지
파닥파닥 연신 자맥질이다
흰 접시 위에 현란한 모양새로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살점들이
차곡차곡 단층을 쌓고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상여의 행렬
피로 얼룩진 형장을 향해
한 바가지 물을 붇자
들숨 날숨 힘겹게 숨 쉬던 아가미 항변은 멈추었다
가게 한구석에 내팽개친
잘려 나간 생선 대가리의 주둥이가
계속해서 입을 벌름거린다
피고인은 아직도 살아있다
문득 세상의 낙오자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혼란은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늘 주변만을 맴돌았을 뿐
중심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허나 찌그러진 깡통처럼 자꾸만 넘어졌다
후미진 골목에 익숙하였으며
탕진할 것 하나 없는 빈껍데기 신세였다
자존심만으로 버텨 온 세상에서
구겨진 지폐처럼 자존심을 접고 살았다
오만 원짜리 신권 지폐들로 가득 찬
인간들의 어깨는 빳빳했다
자신을 알리는 명함 속의 직함도 당당했다
항상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고장 난 시계바늘처럼 멈추어버린 삶
쳇바퀴를 열심히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의 때 묻은 작업복이 부러웠다
영문도 모른 채 서울역 지하철에서
얼어 죽은 노숙자를 욕하지 마라
너희들이 정의롭다고 믿는 이 세상에는
시작부터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
세상 어느 곳에 서 있더라도
깡통처럼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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