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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 - 어떤 조문

에세이향기 2025. 1. 1. 09:01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 - 어떤 조문

 
 

어떤 조문/권현숙

쪼들린 살림 환히 필 거라더니

꿀맛 같은 날 올 거라더니

죽을 둥 살 둥 일만 하더니

 

눈치도 없이 환한 봄날

 

  • 수필가(2023년 한국디카시연구소 디카시신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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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모든 것이 사라진 것만 같던 대지에 생명이 있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 환하고 즐겁고 활기차서 어둡고 우울한 것들은 아예 없어야 하는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에 맞이한 어느 죽음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쓸쓸하다. 일만하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죽음이, 원 없이 피어난 꽃을 배경으로 조문 온 조화처럼 병풍으로 둘러친 저 눈치 없이 환한 봄날이, 오늘도 어디선가 사고를 당해 스러져간 영혼을 조문하고 있는가. 우리 곁에는 저 거미줄같이 도사리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발소리와 피를 토하는 가족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다면 불행은 도미노처럼 우리 사회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단 한 개의 거미줄이라도 다 걷어내야 한다. 봄날이 봄날일 수 있도록.

 

글 . 이기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