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헌옷/김왕노

에세이향기 2025. 1. 1. 06:46

헌 옷 /김왕노

 

잠든 아버지

내가 벗어 던진 헌 옷 같다.

다려도 주름이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

스타일도 뭐도 없이

덧대 바느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밥 터지고 낡아 남루한 아버지

어머니도 손질하다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아버지

일터에서 지쳐 돌아와

쉰내 나는 곤한 잠이 들었다.

뱀 허물처럼 늘어져 잠이 들었다.

피곤한 세상을 두고

겨우 잠으로 도망가신 아버지

 

흑 하고 치받는 내 울음이 들킬까 봐

아버지에게서 멀어지자

아버지는 한 번 더 버려지는 헌 옷이다.

 

경상도 가랑잎/김왕노

 

보훈병원 병상에 가랑잎이 된 자형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고엽제 환자인 자형의 말라서 드러난 핏줄은

가랑잎에 도드라진 잎맥이었다.

월남전 참전에서 한 잎 가랑잎으로 굴러서 끝내 병상까지 온

경상도 가랑잎 한 장

병문안 간 내게 기어코 일어나 그간 팽개친 묵정밭을 갈아엎겠다는

그 불가한 일을 꿈으로 삶고 있어 뒤돌아서서 눈물 왈칵했다.

병을 이기고 무엇을 할까 궁리에 궁리를 더하며

병상까지 무사히 굴러 굴러온 경상도 가랑잎 한 장

자꾸 말라가는 자형의 몸을 눈물로 적셔주던 누나도

자형과 함께 나뒹구는 가랑잎이었다.

건강을 잃으나 더 싱싱한 꿈을 가지고 있던 자형

몸이 아프다 해서 마음까지도 아프지 않던 경상도 가랑잎 한 장

다시 생이란 가지에 단단히 달라붙어

태풍의 살 거뜬히 수십수만 근 베어내는 푸른 잎을 꿈꾸기도 했으리라.

끝내 경상도 가랑잎 한 장 저승으로 굴러갔다는 부음 앞에

아, 하고 울었던 울음이 흘러 모처럼 자형의 마른 몸을 흠뻑 적셨기를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 길어 올린 일가의 슬픔도 적셨기를

 

 

오래된 독서 / 김왕노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 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중 독서이기도 하네.

하루를 마치고 새색시와 새신랑이

부드러운 문장 같은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도 독서 중 독서이네.

아내의 아픈 몸을 안마해 주면서 백 년 독서를 맹세하다

병든 문장으로 씌여진 아내여서 눈물 왈칵 쏟아지네.

 

불량한 날의 독법/김왕노

나의 몰약을 나의 몰락이라

낙타에게를 나태에게로 읽는다.

낙타에게를 낙태에게로 읽는다.

차가운 유빙이라고 적고

차가운 유방이라 읽는다.

고비를 고삐리로 고삐로 읽는다.

자갈을 재갈 잘 가 라로 읽는다.

젓갈을 전갈로 저가로 읽는다.

승기를 성기로 읽는다.

감히 세상 앞에서 겁도 없이

지갑을 지랄이고 읽는다.

각하를 가가가가로 읽는다.

그대의 화양연화를

그대 환향년아로 읽는다.

너를 나라고 나를 너라 읽는다.

불량한 날의 독법을

불량한 날의 도벽이라 읽는다.

이 풍진 세상을 빤히 보면서

니기미시펄이라 천천히 읽는다.

 
 
 


벌레/
김왕노

그저 우리 벌레가 되자.

풀잎 하나만으로도 호의호식을 하는

물방울 하나가 평생 우물이 되는

더듬이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더듬으면 우주에서 가장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해서 까무러치는

명분이고 체면이고 없이

우리 이대로 손잡고 잠들었다가

갑충도 좋지만 푸른 애벌레라도 되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랑의 괄약근으로 이완과 수축하면

우리의 날개가 돋는 풀잎 끝으로

그저 우리 마른 껍질만 남기고서

푸른 하늘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종적을 감추는 벌레나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