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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곰보 주전자/김중일

에세이향기 2026. 5. 31. 19:11

 

 

 

곰보 주전자

 

— 김중일

 

주전자를 본다

태생부터 얽둑빼기에다 어수룩한 게

볼품이라곤 별로 없다

아내가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그릇행상에게 고물과 바꾼 것인데

몇 차례 다비를 치를 때마다 화근내가 등천을 해도

그럭저럭 다시 부려먹었다

이제아무리 문질러도 묵은 때가 끼어

보는 이들마다 입을 대며 민망해 해도

버리면 발병이라도 날 것 같아

문갑 위에 올려 뒀다

가끔 뚜껑을 열어보면

아내의 비린 세월을 담고 있는 듯

깊은 강(하나가 출렁인다

 

 

몇 년 전에 어머니가 이사하실 때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다듬이 방망이가 한 벌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다듬이돌을 쓰지 않은 것이 언제인데 아직도 방망이를 가지고 계시냐 물었더니 그냥 버리기 아까우셨단다홍두깨로도 쓰지 못하는 다듬이방망이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을 그때까지 보관하고 계셨다하긴 누구나 버려야지버려야지 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는 살림살이가 한두 개는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애지중지 값비싼 보석처럼 깊은 곳에 숨겨둔 것도 아니다그냥 예전에 쓰던 물건인데 요즘에는 별 소용도 없는 것임에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살림살이들 김중일의 시 <곰보 주전자>에는 바로 버리지 못한 낡은 주전자가 등장한다.

곰보 주전자라니겉면에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주전자일 것이다그런데 태생부터 얽둑빼기에다 어수룩한 게 볼품이라곤 별로 없다고 한다. ‘얽둑빼기라니얼굴에 굵고 깊게 얽은 자국이 성기게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주전자가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이다새 것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가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그릇행상에게 고물과 바꾼 것이니 처음 집에 들일 때 이미 헌 주전자였을 것이다.

시인은 이 주전자로 무엇을 했을까. ‘몇 차례 다비를 치를 때마다 화근내가 등천했다니 연탄불에아니면 석유곤로 위에 얹어 물을 끓이거나 혹은 무언가 익히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그러니 불 냄새가 배어 있지 않겠는가시인은 이를 고상하게 불교 용어를 써서 다비라 한다기껏해야 물을 끓였을 것이면서 무언가 엄숙한 의식에 사용했던 것처럼 말한다그렇게 주전자를 그럭저럭 다시 부려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사용하다 보니 이제아무리 문질러도 묵은 때가 끼어 보는 이들마다 입을 대며 민망해 해도’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 십리도 못가 발병 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정말 버리면 발병이라도 날 것 같아’ 버리지도 못한다그리곤 문갑 위에 올려 뒀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에 뜨이면시인은 가끔 뚜껑을 열어’ 보는 모양이다빈 주전자 열고 봐야 무엇이 있겠는가넣어둔 것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안보일 것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그 주전자 안에는 아내의 비린 세월을 담고 있는 듯 깊은 강(하나가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의 비린 세월과 출렁이는 깊은 강’ - 바로 세월의 흔적이다.

 

겉면이 상처투성이요 녹이 슬고 때가 끼어 보잘 없는 주전자이지만그 주전자는 고물상의 손에서 건너와 세월을 견디며 물을 끓이고시인이 친구들과 마실 막걸리를 담아왔고우물에서 맑은 물 한 바가지 담아오기도 했을 것이다그렇게 시인과 살아온 아내의 삶이 담겨 있고시인과 아내가 마신 막걸리와 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낡은 주전자를 보며 그 안에 담긴 자신과 아내의 시간을 읽어내는 시인비록 낡은 주전자이지만 그것과 교감하며 아내와 함께한 삶의 흔적을 읽는 모습에서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털털한 중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아마도 시인의 집에 가면 집 어느 구석엔가 아직도 곰보 주전자가 걸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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