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평론

배귀선 평론 /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 - 김산옥 《수필미학》(제34호)

에세이향기 2026. 6. 7. 09:41

배귀선 평론 /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 - 김산옥 《수필미학》(제34호)

 
 

 

1. 긍정의 시원

김산옥의 수필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나누는 이야기처럼 자분자분하다. 서로 보듬고 다독이는 긍정의 평상에는 들고나는 여유로움이 있으며 때로는 옷감을 짜듯 섬세함이 있다. 때문에 쉽게 놓칠 수 있는 장면도 소재로 취하여 작품으로 승화하는데, 자기 긍정의 세계관으로부터 촉발된 그의 사유는 동구 밖 연못의 동심원과 같은 효과를 유발한다. 이때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을 것은 없다”(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는 니체 철학처럼 김산옥의 세계 이해 방식은 대상으로의 전이를 통 한다 더 나은 상태의 긍정을 추구한다. 휴머니즘의 무늬와 사회 문화적 현상을 투영한 이야기에서 긍정의 철학을 유추할 수 있으며, 깨달음과 성찰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계 인식의 시선을 확장한다. 이렇게 볼 때 김산옥의 긍정적 세계 이해에 따른 사유의 메커니즘은 곧 그의 문학에 드리운 긍정의 배아이며 리얼리티의 시원이기도 하다.

또한 김산옥은 ‘나의 창작방법’에서 “시 같은 수필 소설 같은 수필” 모색에 대해 언급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고 재해석 하는 창조적 주체로서의 시선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 지향은 수필의 문학성 논쟁을 불식할 수 있는 시도이기도 할 것이며, 경험 사실의 진술이라는 수필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정신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김산옥이 구사하는 언어의 질감은 모성성과 이타성 긍정의 담지를 넘어 때론 유유幽幽의 시간을 걷는 관조이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을 엇걸려 놓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들리지 않는 소리를 기표화함으로써 감동을 그려내고자 하는 김산옥 수필가의 바람처럼 그의 문체는 일정 부분 시적 묘사와 서사적 입장에 닿아 있으며, 그의 감각은 시대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일테면 리얼리티와 성찰의 시선으로 가족애의 실천과 잊혀져가는 문화의 소산에 대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자기 긍정과 타자 긍정의 시각을 확보한다. 타자를 통해 나를 보기도 하고 나를 통해 타자를 보는 성찰적 리얼리티와 무소유적 삶의 의미를 생성함으로써 인간애적 이야기를 씨줄로 풀고, 경험적 자아의 깨달음을 날줄로 엮어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를 실현한다. 이러한 맥락에 바탕을 두고 김산옥의 신작 2편 (<만약에>) 외 1편)과 발표작 5편 (<늦게 피는 꽃>) 외 4편)을 통해 긍정적 삶의 통찰이 투사된 그의 수필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 휴머니즘의 무늬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샤르트르는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언급한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그의 언술은 이 시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간과할 수 없게 하는데, 이 지점에 김산옥 수필의 휴머니즘이 얼비친다. 가족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호막으로서 한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원초성의 이미지를 함의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인문학 열풍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교시성 어휘가 사어가 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왕왕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족애를 바탕으로 가족의 의미와 가치 문제를 간접적으로 묻는 김산옥의 오디세이는 인간 실존의 문제와 닿아 있으며 더러 휴머니즘의 무늬로 나타난다.

그날 남편이 내 얼굴을 씻겨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버님 세수시켜 드리는 일이 그저 밋밋하고 형식에 불과했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어긋나는 착각일지라도 아버님은 지금 내가 얼굴 씻겨드리고 손발 씻겨드릴 때, 가장 행복할 거라고 믿고 싶다. 오래전 잊힌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을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ㅡ<세수>에서

 

예부터 우리 민족에게 세수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먼저 하고 대상을 마주하는 것이 상례였다. 일상의 청결함을 중요시한 문화이기도 하지만 세수는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가꾸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의미를 중층화해 보여준다. 즉, 씻는 것과 씻겨주는 것의 의미를 통해 가족애를 되새기게 하는데, 전자가 자의적이고 자신을 향한 행위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이타적 의미를 배태한 어휘로 대상과 대상을 연결하는 행위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후자에는 봉사와 희생정신의 저류가 충일한데, 남편이 화자를 씻겨준 것으로 인해 시아버지를 세수시켜 드리는 일이 형식적이지 않고 마음을 다한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과적 서술은 마음이라는 현상이 서로 관계 맺고 있음을 무언중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한 화자가 매일 아침 시아버지의 얼굴을 씻겨드릴 때 화자의 내면을 자극하는 것은 모성애적 감성이다. 화자의 어머니가 어린 아기였을 적 자신의 얼굴을 씻어주었듯 누군가의 얼굴을 씻어주는 행위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류로써 모성적이며 생래적 발로가 아니면 어려울 수 있다.

전문성을 담보로 노쇠한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는 일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공양하는 김산옥의 <세수>는 가족애를 넘어 인간애의 회복과 실현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휴머니즘의 무늬를 보는 이유이다.

 

자꾸만 토해서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허기가 찾아왔다. 언니 등에 엎드려 내려다보는데, 저만치 개울창에 찔레꽃이 막 피어나고 있다.

(……)

지금도 그때 언니 등에서 내려다본 찔레순을 잊지 못한다. 작은 등으로 나를 매달고 산비탈을 올라가던 언니 모습은 더욱 잊을 수 없다.

ㅡ<우리 언니>에서

 

‘언니’라는 호칭은 다의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 언니>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어떤 암시나 포괄적 의미를 함축한 제목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의미로서 ‘언니’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의 ‘언니’는 동생을 배려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로 의미화된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신음하는 화자의 유년을 “작은 등으로”업고 산비탈을 오르는 장면은 가족애의 정점이다. 때문에 화자에게 찔레순은 초인 같은 언니의 모습과 힘께 저장된 기억의 디아스포라이다. 그 기억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훈적 의미로 전이 되어 세대를 이어가는 인간애의 암묵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는 자기 긍정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배려는 자기 배려에서 비롯되어 혈육을 넘어 타인 배려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 작품 역시 긍정의 철학을 함의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기를 업지 않고 앞으로 안아 어깨어 거는 아기 띠를 사용한다. 업으면 아기 다리가 휘어진다는 둥, 가슴에 심장 소리를 듣게 해 줘야 한다는 둥 여러 가지 이유로 처네 포대기를 멀리한다. 딸아이 직장 관계로 내가 육아를 돌봐야겠기에 불편한 슬링 띠를 마다하고 처네를 원했다.

ㅡ<그곳에서>에서

 

문학 행사에 참석한 화자가 목성균의 ‘누비처네’라는 작품 낭송을 들으며 추억 속의 연둣빛 누비처네를 떠올린다. 처네를 매개로 가족의 결속과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연결하는 이 작품에는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연둣빛 누비처네는 두 딸을 낳은 후 느지막이 셋째를 임신한 화자에게 시어머니가 선물해준 것이다. 여러 겹으로 얼키설키 얽힌 기억이 ‘누비처네’라는 사물을 매개로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데, 화자에게 연둣빛 누비처네는 짐작컨대 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내재된 물건일 것이다. 말하자면 시어머니가 선물한 처네의 연둣빛은 아들을 상징하는 색이자 딸만 낳은 화자에게 무언의 권고장 같은 의미를 상정한다. 시어머니의 바람이 누비된 누비처네를 통해 가족의 결속을 내포하는 동시에 남아선호 사상에 침식된 문화의 이면적 진실을 우회적으로 적시한 대목이기도 하다. 일견 울컥한 기억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긍정의 서사가 흐른다.

 

이북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시아버님은 육이오 때, 피난 내려와 처자식과 생이별을 했다. 시부모님은 전쟁이 끝나면 바로 올라오라고 돈 보따리만 싸 들려서 아들 삼 형제를 이남으로 피난시켰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북이 가로막혀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38선은 그어지고 가족과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ㅡ<그렇게라도-굿을 하던 날>에서

 

이 작품은 이산의 아픔을 지닌 가족사를 통해 역사의 한 부분을 환기 시킨다. 다양한 관계적 실존들이 뒤엉켜 사는 현대인들에게 한국전쟁의 상흔인 이산의 아픔은 점점 잊히는 현실이다. “이북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시아버님은 육이오 때, 피난 내려와 처자식과 생이별”한 아픔을 안고 산다. 어느 날 시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굿을 하게 된 화자는 그 일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묘사함으로써 굿에 대한 낯설고 묘한 경험을 살풀이하듯 풀어놓는다. 굿이라는 민간신앙과 한국사의 아픔인 이산가족 이야기를 긍정으로 융화시킨 작품으로 화자의 내면에 휴머니즘의 무늬 하나를 덧그린다. 혼귀를 불러들여 대화하고, 울고 웃는 무속인들을 보며 “믿기지 않는 그들의 한 서린 울음이 연극이었다면 격조 높은 예술”일 정도라고 술회한다. “그렇게라도”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화자에게 그러한 무속적 행위가 희미해져 가는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연대를 통해 풀이됨을 알 수 있다. “최첨단 기술이 하늘을 치솟는 문명 속에서, 전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실행했다는 자부심과 인간으로서 도리를 해냈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긍정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이 혹은 크레바스crevasse

 

사이라는 말에는 대상과 대상의 소통이 전제되지만 빙하氷河나 눈 덮인 골짜기의 갈라진 틈의 의미를 지닌 크레바스엔 그러한 통로의 의미보다는 불안과 공포가 내재한다. 김산옥의 수필에 나타난 소유욕의 탈피에 따른 무소유적 깨달음의 주제를 드러낸 작품에서 이처럼 상반된 의미를 지닌 사이와 크레바스(틈)을 추출할 수 있다.

욕망은 말 그대로 무언인가를 더 많이, 더 나은 상태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많다’라는 개념은 항시 ‘더 많다’라는 개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항상 적다는 개념이 된다. 인간인 이상 무한히 소유적 태도만을 고집할 수도 없고 무한히 무소유적 태도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하여 권력욕, 지식욕, 명예욕 등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를 소유와 무소유의 사이에서 늘 서성인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이와 크레바스인 셈이다. 김산옥은 영생불멸에의 직시 (<만약에>)와 스스로를 행복에 이르게 하는 지식욕 (<늦게 피는 꽃>), 편견을 불식시킨 인식의 전환 (<예기치 못한 사태>)을 통해 사이와 크레바스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제부터라도 비움으로 내게 주어지는 오늘을 살고 싶다. 만약에 내가 죽더라도 가볍게 길 떠날 수 있게, 애착도 버리고, 소유욕도 버리고, 구석구석 쌓아놓은 일상의 찌꺼기도 모두 비우며 살고 싶다. (…) 비우고 나면 금세 그 자리에 주리를 트는 번뇌 속에서 날마다 마음 다잡아 본다.

ㅡ <만약에>에서

 

만약 자신이 죽은 후를 생각해 보라는 백중기도 날의 화두를 통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 작품은 지극히 인간적인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애착도 버리고, 소유욕도 버리고, 구석구석 쌓아놓는 일상의 찌꺼기도 모두 비우며 살고 싶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즉,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물음을 이면에 둔다. 죽음이란 인간의 인식 밖에서 노는 그림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산옥은 “피사의 사탑처럼 쌓아놓고 쓰러질까 염려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본다. 집안 곳곳에 자리 잡은 물건들이 화자를 깨닫게 하는 대상으로 작용해 화자의 소유욕을 경계한다. 물건의 소유적 가치가 아닌 물건이 물건으로서 지닌 감동과 그 감동 경험이 나를 지금의 나가 아닌 다른 나로 다시 살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이란 “비우고 나면 금세 그 자리에 주리를 트는 번뇌”가 일어난다. 하여 화자는 “날마다 마음 다 잡아”보며 다짐을 한다.

일찍이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던 나옹선사도,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소로우도 무소유적 삶을 강조한 바 있다. 어떤 분별심이 없는 상태를 진정한 무소유라 정의하는 불가에서처럼 물질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무조건 더 많이 갖는 것이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적게 갖는 것이 무소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무소유는 소유의 다른 한쪽이다. 소유가 없으면 무소유를 주창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무소유란 소유적 삶과 무소유적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내면의 크레바스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작품 속 자아는 영생불멸하는 대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현재인 ‘오늘’의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크레바스가 아닌 사이를 붙든다. 이러한 깨달음과 실천적 사유의 기저에는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가 있다. 더하여 미래를 추론하고 예측하는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미래적 의미만을 내장한다기보다 그 의미 안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까지도 덧입혀져 있다.

 

나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긍정어를 쓰며 살아간다. (……) 나는 남보다 나에게 존중받고 싶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나에게 자존감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뒤늦게 하는 공부가 부끄러워 자존심만 내세워 멀리하였다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영영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꿈꾸며 산다.

ㅡ<늦게 피는 꽃>에서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는 벼슬하지 못한 선친의 신위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그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죽어서도 배워야 할 만큼 사는 동안 공부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산옥의 배움의 열정은 유교 경전 《논어》의 ‘학이’편을 떠오르게도 한다. 그 시대 가난으로 인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화자가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에 들어가 국문학도로서의 꿈을 키운다. 이 과정은 부정 접속사인 ‘ 때문에’보다 긍정 접속어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통해 자기 존중이라는 사유의 틀을 생산한다. 자존심만 내세우고 학업에의 꿈을 포기했다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고백이 당연한 진술 같지만 그 안에는 자기 존중과 자기 긍적적 삶의 원동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뜻을 이루기까지는 거기에 주어지는 무게만큼”의 생채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산옥에게 그 “생채기들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삶의 에너지로 승화한다.

 

내 옆에 다가와 곁을 준다. 개에 대해 그토록 질색하던 내 마음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어느 틈에 녀석은 우리 가족의 일부가 되어있다. (……)따지고 보면 녀석도 나도 짐승에 불과하다. 나다음 날 면회하러 갔다. 다행히도 염증 수치도 떨어지고 활동량도 늘었다. 녀석은 살그머니 는 말을 할 뿐이고 녀석은 말을 못 할 뿐이다 어찌 편견을 두리.

ㅡ<예기치 않은 사태>에서

 

애완견 키우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화자는 어느 날 딸이 데리고 온 “세부”라는 강아지 한 마리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편견에 갇혀 있었음을 인식한다는 이 작품 역시 내면의 크레바스를 드러낸다. 식구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애완견 "세부"와 화자 단둘이 남게 된다. 처음엔 마음을 줄 수 없어 “완벽한 타인”처럼 지냈으나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세부가 동물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을 계기로 화자와 강아지 사이에 감정이 움트게 된다. 이를 테면 갈등의 시간이 흐르면서 적적함과 외로움을 상쇄하는 매개로 작용하는데 그 위로의 에너지 비중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동등한 입장으로 승화됨으로써 가족관계가 이루어진다. 갈등의 골에 소통의 물꼬가 생성되어 대상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킨 것이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기 마련이지 싶어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화자였지만 소유의 감정과 무소유의 감정 사이에 끼어 있던 편견이 존재했음을 깨닫고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것인데, 깨달음은 일상의 변화를 야기하고 변화는 또 다른 생성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언술이 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4. 그늘 경작술

 

문학은 삶의 이야기를 언어로 경작하는 예술이다. 언어의 씨앗을 어디에 어떻게 뿌리고 가꾸느냐에 따라 발아하는 형태는 천양지차이다. 문학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일본 문단의 기인奇人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겐지는 예술가를 음지식물이라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은 양지적 입장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끼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도 시선이 닿아야 한다는 것으로 예술가를 향한 암묵적 상징일 것이다. 따라서 김산옥은 “진정한 민낯으로 독자를 만나”고 그늘져 “후미진 곳”에 존재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그의 내면을 흔드는 음지의 대상들은 “가녀리게 작은 풀꽃일 수도 있고, 귓불을 스치는 바람결”이거나 풀숲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일 수도 있으며, 재래시장 좌판에 앉아 졸고 있는 노인”일 수 있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것들을 밝힘으로써 음지의 경작술과 같은 창작 의도를 드러낸다.

음지 속에 양지가 있듯 음지는 음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변화를 거듭하는 유동의 공간으로써 톱니바퀴처럼 음지와 양지가 맞물려 있다. 김산옥 수필에 내재한 긍정의 사유도 결국 이러한 기조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가족애를 통해 휴머니즘의 실천적 지성을 감당하거나 가족사를 통해 역사를 되짚지도 한 사유로 드러나기도 하고, 사소하지만 요긴했던 사물인 “처네”를 복원하여 사라져가는 문화에 대해서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작가정신을 표출하기도 한다. 더하여 깨달음을 통한 실천과 배움의 정신, 그리고 편견을 불식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바탕에 시적이고 소설적인 수필에의 지향을 ‘나의 창작방법’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서사라든가 시적 표현에 즈음한 상징과 이미지 등 여타의 요소들이 아직 작품 속에 두드러지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그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름지기 문학은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당위적 존재이다. 때문에 김산옥의 문학적 기투 역시 스스로 변화하는 문학의 특성을 염두에 둔 시도라 하겠다.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는 말처럼 문도文道에 어긋남이 없는 새로움을 향해 있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본 평론 제목에 언표한 김산옥의 ‘자기 긍정 오디세이’는 수필의 미래를 위해 오늘도 그늘의 언어를 경작하는 것일 게다. 이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행적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지향이며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