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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다시 생각해 보는 수필 쓰기/강돈묵

에세이향기 2026. 5. 22. 20:43

다시 생각해 보는 수필 쓰기/강돈묵

 

 

 

 

 

  인간은 한시도 멈추지 않는 변화의 활시위를 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 폭이 크냐 작으냐, 빠르냐 느리냐에 따라 달리기도 하고 눕기도 하는 존재. 하지만 항시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히 파악하며 민첩하게 대처하려 애쓰는 존재가 인간이지 싶다.

  그 와중에서도 나름 불행을 밀쳐내고 행복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삶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노력하여야 소유할 게 있음을 알기에 힘들어도 누웠던 몸을 바로 일으켜 세우게 된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에 충실하지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고, 도태되기 마련이라는 진실도 알고 있다.

  한번 사는 인생 편히 살다 가자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뭔가 태어난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도 각양각색으로 다르다.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작가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살면서 터득한 진실을 누군가에게 감동과 재미로 전달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깊은 수면에 든 시간에 홀로 깨어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필 작가들은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 민감하게 대처해 왔다. 자신이 경험한 바를 곱씹어보며 의미를 찾아 나서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삶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끝없이 추구해 왔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맞닥뜨리는 사물들에 함유된 본질을 찾아 형상화하는 데에 남다른 정열을 쏟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시간적 공간적 진행에 따라 기술하는 데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며 생의 근본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수필의 마당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이번 《계간현대수필》 봄호에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영희의 <미쳐야 미친다>

  먼저 이영희는 <미쳐야 미친다>를 통하여 글쓰기의 마음가짐을 정리하고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어찌 보면 글쓰기의 기초 이론을 정리하고, 해설이나 비평의 주장을 모아 놓은 듯하지만,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내용들이다.

  처음의 시작은 아주 평범한 엄살에서부터 출발한다. ‘더는 기대할 게 없는 쓰기에 피곤해져 간다. 늘 비슷한 어법, 비슷한 주제로 신선함이 없고, 제스처만 요란하다. 작가라는 이름에 웃음거리가 안 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빠졌던 웅덩이다. 그러면서 정해진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다가 시간에 쫓겨 마무리한 경험도 돌아본다. 결국 작가는 ‘게으름’과 ‘성급함’ 모두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단정한다. 작가들이 흔히 고민하는 대목이다.

  글 쓰는 이라면 평소 독서가 필수다. 남의 글을 읽지 않고 참신한 내용을 담아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도 요란하다 싶으면 덮고 싶은 욕망이 솟는다. 이를 참고 이겨내야 자신의 것이 된다. 노력 끝에 등단한 시인에게 들려준 정민 교수의 말을 동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 무식한 노력 앞에서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새삼스럽지만, 글쓰기에서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뼈와 가죽만 남은 김종원 작가의 치열한 삶도 소개한다. 그는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글을 부정한다. 이런 글은 대부분 안에 이야기가 있거나 문장이 원만하여 독자를 유혹하지만, 김종원은 읽기 시작하면 자꾸만 멈추게 되는 글을 요구한다. 자주 멈추어 생각해야 읽은 후에 남는 게 있다는 것이다. 멈추게 하는 글은 작가의 사색에서 나온 문장이라서 깨달음을 준다.

  이영희는 <미쳐야 미친다>에서 글쓰기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수필의 영역에 넣기에 부담이 있는 글이지만, 실험적인 시도로 좋게 받아들이고 싶다.

 

심선경의 <모과의 시간>

  심선경은 <모과의 시간>에서 글감의 본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또 이를 어떻게 메시지로 연결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이 여타의 숨탄것들과 다른 것은 현실의 선택을 위해 과거를 끌어들일 줄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 하겠지만, 혹독한 멍에이기도 하다. 신의 기막힌 한 수는 인간에게서만 유독 꼬리를 뽑아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짐승은 꽁무니에 붙어 있는 꼬리를 흔들어 수시로 자신의 지난 시간을 지우면서 살아가는데, 인간은 과거를 지우는 꼬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늘 과거의 일에 묶이고 그로 인해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기 일쑤다. 이 때문에 성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어떤 경우이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다행스럽게 인간들은 슬기로워서 그 방향을 바람직한 쪽으로 스스로 지향하여 다가올 미래를 열어간다.

  작가 심선경 역시 외면하고 지내던 모과에 대한 기억을 느닷없이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여기에는 은은한 ‘향’이 둘 사이의 다리를 놓는다. 세상 모든 풍파를 한 몸에 새긴 듯, 울퉁불퉁한 껍질과 흠집투성이 표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석에 밀쳐 뒀던 모과. 세상 모든 것의 시선이 외모에 머물 때, 에너지를 향기로 바꾸고 누군가의 호흡으로 스며들어 기억의 지층에 각인시키는 모과.

  수필이 종내에는 사람 이야기로 귀결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수필가인들 모를까. 작가 심선경은 조직 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무실 구석에서 일만 하던 얼금뱅이를 소환하여 모과와 연결한다. 그리고 그를 ‘모과남’이라 지칭한다. 별로 의식에 잡히는 바가 없는 그가 지난 시간의 진득한 일 처리로 감사에서 터진 큰일을 수습하게 한다. 이 글에 나오는 ‘햇빛을 독차지하는 듯한 인물’은 상호 대비를 위해 동원된 인물이 틀림없다. 위기를 넘긴 후 작가 심선경은 이 모과남의 존재를 무겁게 인식한다. 어수룩하고 말이 없으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만 철저했던 그 남자는 모과와 너무도 닮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과에 대해 길게 예찬의 글을 적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을 성찰하게 된다. ‘모과는 서두르지 않는다. 단지 숙성될 뿐이다. 단단한 표피 아래에서 은밀한 변화를 일궈내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억눌렀던 기운을 일제히 해방한다. 그 향은 찰나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문 너머로, 책장 틈새로 파고들어 기억 속에 박힌다. 계절이 바뀌어 생을 거두어야 할 때도 모과는 쉽게 썩지 않는다.’ 모과는 마침내 작가마저도 스스로 자책하게 만든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타인의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내 삶을 증명하려 애썼던가.’ 인간은 과거를 지울 수 없기에 지난 삶의 명암을 들여다보며 성찰하게 되는 존재다.

 

김선아의 <문 문>

  작가 김선아의 <문 문>. 역시 일상을 살아내면서 감각되는 일에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어 서로 견주면서 성찰하는 글이다. 인간은 가지고 있는 기억 속에서 순간순간 과거를 드나들며 자신을 성찰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이사하여 부딪치게 되는 두려움. 마음이야,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이니 충분히 견뎌내리라 생각했는데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불편하다.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들이닥쳐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밀려온다.

  그러던 중 다행히 아파트 주변의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게 되었다. 오가는 사람들과 서로 말 붙이기가 수월하다. 점차 동네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게 되고, 키운 채소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터놓고 지내는 처지가 된다. 내어놓는 내 것이 어색함을 녹인다. 이제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면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해 먼저 말도 건다. 그들은 낯설 텐데 웃으며 답례한다.

  작가가 처음 이사하였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이웃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못하고, 외출마저 꺼리며 문 안에 갇혀 살던 작가. 그 모습은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병아리가 아니었던가.

  작가 김선아는 현실에서 부딪치는 감각을 과거의 추억과 길을 트고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수필에서는 ‘돌이켜보면’이나 ‘지난 세월’이란 어휘가 과거로의 회귀의 길목에 버티고 있다. 돌아보니, 긴 세월 문틈으로 들이치는 찬바람과 폭풍을 틀어막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항상 걸어두었던 문도 열겠다는 각오다. 붙박이로 나만의 세계만을 고집하던 일상이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이는 과거에 대한 성찰에서 얻은 행위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단련된 문을 열어 태풍이 불건, 북풍이 불건 모두 맞아들여야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어떠한 고통의 어려움이 닥쳐와도 감내하고 스스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이다. 마음에 드는 바람은 불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바닷물을 뒤집어 생물을 살리는 태풍이라도 불어와 답답한 마음을 뚫어 놓기를 소망한다. 앞으로 작가 김선아의 집에는 문이 대문짝만하게 열려 있고, 삶은 분명 웃음이 가득하리라 믿는다.

 

안윤자의 <내 심장의 불꽃>

  내용이 충실하고 형식마저 치밀하면 독자들은 책을 덮지 않는다. 결국 좋은 수필은 이 두 가지 요소, 즉 내용과 형식이 제대로 맞아떨어질 때 얻어진다. 거기에 글을 완성하는 소소한 점까지 동원하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작가의 심오한 철학이 뒷받침된 글에, 개성이 있는 문장력이 따라준다면 가히 좋은 수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에서는 신기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참신한 것을 원한다. 전혀 접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길 주문하지 않고, 누구나 다 접한 일상이라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느냐가 관건이다. 똑같은 글감이라도 작가만의 해석에서 나온 의미를 갈망하는 게 독자이다. 여기에 작가의 심리적 분석과 상징적 복선이 따라준다면 그 여운은 오래 독자의 가슴에서 머물 것이다.

  안윤자의 <내 심장의 불꽃>은 우리가 늘 부딪치며 살고 있는 평범한 삶터에서 시작한다. 아침저녁 늘 드나들어 작가의 체취가 먼지처럼 얹혀있는 지하철역. 그것도 옛 대궐이 곁에 있는 안국동과 종로통, 을지로를 두루 거치는 경복궁역이다. 이처럼 일상의 현장에서 접하는 일이니, 의미의 확산은 충분히 가능하다.

  모임 시간에 맞추려고 작가는 분주히 3번 출구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뭔가 적혀 있는 종이를 들고 스님 한 분이 시주를 요청한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스님의 예상치 못한 요청에 작가는 반사적으로 바삐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이내 되돌아오고 만다. 시주해 달라던 스님의 말 한마디가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탁발 스님 앞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단정히 회색 승복을 입고 있는 비구의 몸집은 가늘고, 얼굴빛은 맑은 인상이었으나 어딘가 허약해 보인다. 평생 과식이나 탐식 따위의 유혹에는 빠져든 적이 없을 듯하다. 기름기라곤 전혀 없는 탁발승의 인상에서 작가는 절제와 소식(小食)의 삶을 읽어낸다. 대중의 발길이 끊어진 깊은 산중의 허름한 암자에서 세상의 중생들을 위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고 있을 스님. 그 스님에게 시주한 돈이 고작 만 원짜리 한 장이라니….

  지갑에는 오만 원짜리 지폐가 있었는데도 그걸 꺼내지 못하고 만 원짜리를 내민 자신을 후회한다. 비록 타오르는 불꽃은 아니더라도 사그라든 불씨라는 걸 들춰냈기 때문이다. 내 것을 내주고도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시간의 못난 제 몰골을 되돌아보며 작가는 깊은 성찰에 빠진다. 인간만이 갖는 과거로의 여행에서 얻는 그림자다. 이 글에서는 고고한 스님과 속세인의 대비, 그리고 배경의 상징적 묘사가 암시하는 분위기 등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과거의 궁궐과 현재의 역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수행 중인 스님과 속물근성에 머문 내가 만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는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일상에서 얻어진 글감, 즉 사물이나 사건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서 형상화하는 문학이 수필이다. 허구가 자유롭지 않은 수필에서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되돌아보면서 내적 자아를 다지고 성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이때 작가의 삶에서 얻은 깊은 철학이 요란한 동작을 숨기고 끼어든다면 더욱 가치 있는 점잖은 수필이 되리라 믿는다. 많은 수필가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다음 여름호에서는 더욱 수필다운 수필을 만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