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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사건’의 문학, ‘정동’의 잔여-현대수필 봄호[계간평]

에세이향기 2026. 3. 26. 09:09

   ‘사건’의 문학, ‘정동’의 잔여

-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으로 본 <현대수필> 겨울호(통권136호)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오늘의 수필은 더 이상 체험을 정리해 의미로 귀결하는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최근의 성취 있는 작품들은 일상의 사물과 규범, 신체의 변화 같은 미시적 계기를 통해 독자에게 하나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언어의 장을 구성한다. 수필은 여전히 삶을 설명하는 장르여야 하는가, 아니면 삶이 스스로 흔들리는 순간을 발생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는가. 의미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읽는 순간 독자의 몸과 인식에 사건을 일으키는 글쓰기, 그것이 오늘의 수필이 도달해야 할 자리라면,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새로 불러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방법론을 묻는 것이 아니라, 수필이라는 장르가 지닌 존재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선언에 가깝다.

김봉선의 <등꽃>과 박찬익의 <아파트 114동>에서 자연과 공간은 더 이상 설명되어야 할 의미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의 감각과 인식이 직접 개입되는 체감의 장(field of affect)으로 전환된다. 이 전환의 순간, 수필은 삶을 해석하거나 정리하는 매체가 아니라, 읽는 자의 몸과 의식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장치, 즉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사건의 발생 장치로 작동한다. 이미숙의 <머리카락>에서 ‘머리카락의 탈락’ 장충무의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에서 ‘금지의 압력’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체감의 장이 되며, 그 순간 수필은 의미의 전달자가 아니라 사건의 발생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권대근의 본격수필론이 강조해온 ‘정동의 글쓰기’가 구체적 작품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본격수필의 미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사실–정서–교훈의 안정된 삼각형을 벗어나, 사건 정동 강도의 불안정한 장으로 이동하려는 의지, 설명하지 않고 발생시키려는 글쓰기의 윤리가 그 핵심이다.

계간평 대상작품으로 선정된 <등꽃>, <아파트 114동>, <머리카락>,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 네 편의 글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네 작품은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삶을 해석하지 않고 살아지게 만드는 글쓰기, 즉 정동을 통해 현재를 흔드는 수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사건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읽는 지금 여기에서 감각과 인식의 배치가 달라지는 변화 그 자체다. 따라서 이 두 작품에서 일어나는 핵심은, 등꽃과 아파트가 상징이나 은유로 수렴되지 않고, 시간 반복 미세한 차이의 흐름 속에서 독자를 끌어들여 정동의 진동을 발생시키는 장이 된다는 점이다. 의미는 나중에 따라오거나 끝내 도착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 장에 잠시 머무는 동안,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때, 수필은 설명을 멈추고 사건이 된다.

전통적으로 수필은 삶의 한 장면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을 서술하고 그에 따른 정서를 드러내며, 궁극적으로는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장르로 이해되어 왔다. 이때 수필의 미학은 체험의 진실성, 감정의 진솔함,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적 의미의 제시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수필은 사실 정서 의미라는 삼항 구조 위에서 작동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본격수필은 사실을 재현하기보다 사건을 발생시키고, 정서를 표현하기보다 정동을 유발하며,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강도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수필은 더 이상 삶을 설명하는 산문이 아니라, 독자의 감각과 사유 속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작동하는 미학적 장치가 된다. 본고는 질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을 방법론으로 삼아, 네 편의 수필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등꽃은 왜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면서도 늘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서는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아파트 114동의 창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삶을 감지하고 스쳐 지나가는가. 밤의 신호등 앞에서, 혹은 산책길의 목줄 앞에서, 금지는 언제 규칙을 넘어 몸의 감각으로 다가오는가. 그리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의 리듬이 달라지는 사소한 순간들은 언제 삶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자각이 되는가. 이 네 편의 수필은 이렇게 낮고 조용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한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삶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이 머무는 자리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사건의 가장자리에 가깝다. <등꽃>에서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몸을 스치는 방식으로 다가오고, <아파트 114동>에서 일상은 반복 속에서 문득 흔들리며 얼굴을 얻는다. <머리카락>은 사소한 신체의 변화 속에서 존재가 서서히 소실되고 생성되는 과정을 순수사건으로 포착한다.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는 규칙과 욕망이 맞닿는 지점에서 미세한 저항의 정동을 포착하고, 또 다른 한 편의 수필은 신체와 일상이 조용히 어긋나는 찰나를 통해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 네 편의 수필은 말한다기보다 배치하고, 설명하기보다 남겨둔다. 질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이 작품들은 서정의 호흡으로 증명한다.

 

김봉선의 <등꽃>은 ‘자살예방센터’라는 사회적 현장을 사실로 재현하는 수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가 무너지다 다시 일어서는 사건의 발생 순간을 정동의 밀도로 포착한 본격수필이다. 이 작품에서 ‘등’은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사건이 스쳐 지나가는 표면이다. 얼굴과 언어가 통제되는 사회적 전면이 아닌, 숨길 수 없는 후면에 삶의 진동이 고스란히 남는다. 작품은 인물의 심리나 교훈을 설명하지 않고, ‘흔들리는 등’, ‘굽은 등뼈’, ‘등을 쓰다듬는 손’이라는 반복적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독자의 몸에 직접적인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는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 기대어 쓴 권대근 본격수필론의 핵심, 즉 의미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강도를 생성하는 글쓰기의 전형적인 성취다. 특히 구조적으로도 이 작품은 상담자의 성장담이나 미담으로 귀결되지 않고, 등꽃이 피고 바람에 멀어지는 장면에서 사건을 열어둔 채 종결함으로써 독자에게 이후의 삶을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이 작품의 정동적 핵심은 다음 단락에 가장 응축되어 있다. “등을 보는 순간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다. 등줄기마다 보랏빛 등꽃이 피었다. 살아가는 이유는 서로의 등을 쓰다듬고 등을 구부려 껴안기 위함은 아닐까.” 이 대목에서 ‘등꽃’은 은유가 아니라 사건의 가시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접촉이 자연의 생장 이미지로 전이되며, 이는 현대수필이 지향하는 존재가 홀로 완결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자란다는 생태적 인식과 깊이 맞닿는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며, 돌봄은 존재의 구조”라고 말했듯, 이 작품에서 돌봄은 윤리나 제도가 아니라 손의 온도와 시간의 동행으로 나타난다. 김봉선은 절망을 극복의 서사로 승화하지 않고, “따스한 손길만 있다면 스스로 꺾여 주저앉지 않을 것”이라는 문장에 삶의 최소 조건을 남긴다. 이로써 <등꽃>은 인간의 취약함을 숲의 그늘처럼 받아들이며, 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정동적 현대수필의 한 성취로 평가할 수 있다.

박찬익의 <아파트 114동>은 한 인물의 전기를 서술하거나 선행을 기리는 헌사문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비로소 발생하는 사건을 현재화한 본격수필이다. 이 작품에서 이태석 신부는 중심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부재하는 존재이며, 서사의 실질적 초점은 ‘그를 알았음에도 알지 못했던 나’의 현재적 각성에 있다. 권대근이 말한 본격수필의 핵심이 사실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사건이 다시 일어나도록 언어를 배치하는 글쓰기다. 이 작품은 ‘114동’이라는 일상적 숫자 기호를 통해 사건의 영속적 재도래를 성취한다. 아파트 동 번호는 기념비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이며, 그 안에서 죽음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정동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영웅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의 부끄러움, 미루어온 실천과 미미한 나눔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를 윤리적 판단의 바깥으로 이끈다. 이는 의미의 교훈이 아니라 정동의 울림으로 독자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이며, 들뢰즈가 말한 “사건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는 명제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 수필의 “거실에서 내다보면 바로 건너편 아파트는 114동이다. 아침저녁으로 늘 마주하는 숫자다. 마음속으로 1과 1 사이에 점 하나를 찍으면 1.14가 된다. 1월 14일이다. 태석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소풍을 끝내고 떠난 날이다.”에는 정동적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여기서 숫자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의 매개체가 된다. ‘114동’은 기념일을 상기시키는 표식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동을 발생시키는 장치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랑하는 이는 부재할수록 더욱 현존한다”는 말처럼, 이태석 신부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작가의 삶 깊숙이 개입한다. 작품의 말미에서 ‘작은 발자국이 점차 커진다’는 서술은 개인의 감동을 넘어 사건의 전염성을 암시하며, 사건의 존재론이 도달해야 할 윤리적 지평을 연다. <아파트 114동>은 선한 삶을 찬미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삶이 어떻게 나의 현재를 흔들고 다시 살게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로써 이 작품은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한 성취, 곧 사건으로서의 기억, 정동으로서의 윤리를 설득력 있게 구현한 본격수필로 평가할 수 있다.

이미숙의 <머리카락>은 일상적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화의 차원을 넘어, 존재가 생성 변형 소멸하는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시키는 수필이다. 이 작품에서 ‘머리카락’은 신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시간의 표면이며,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장이 된다. 작가는 머리카락의 생장과 탈락, 변형의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1인칭 복수의 목소리를 통해 존재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배치를 선택한다. 이는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에 따른 본격수필론이 강조하는 ‘주체의 고백’이 아니라 ‘비인칭적 정동의 발생’에 가까운 전략이다. 머리카락은 충성스럽게 주인을 따르다가 결국 떨어지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 과정에서 독자의 신체 감각에 직접 닿는 정동을 생성한다. 노화라는 보편적 주제를 교훈이나 감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떨어질 시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건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작품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강도를 남기는 글쓰기의 성취를 보여준다.

“이제는 모두 떨어질 시간이 다가옵니다. 주인의 어깨와 등에 간신히 매달려보지만, 그 끝은 하수구나 폐기물 통에 처참하게 버려지고 분해되는 일입니다.”라는 진술에 이 작품의 정동적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장면에서 탈락은 비극도 은유도 아닌 존재의 이행이다. 롤랑 바르트가 “노화는 의미가 아니라 감각으로 온다”고 말했듯, 이 작품은 늙음을 설명하지 않고 ‘떨어지는 감각’을 독자에게 체감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또한 하이데거의 “존재는 언제나 이미 사라짐을 향해 있다”는 사유와도 맞닿아, 머리카락의 운명은 곧 인간 존재의 시간성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머리카락>은 상실을 애도하는 글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정동의 언어로 통과시키는 현대수필이다. 이 작품은 본격수필이 어떻게 미시적 사물을 통해 거시적 존재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사례로, 현대수필의 확장된 가능성을 증명한다.

장충무의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는 규범과 일탈, 법과 욕망의 경계를 윤리적으로 판정하지 않고, 그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수필이다. 이 작품에서 신호등 무시, 반려견 목줄 해제, 아파트의 끝없는 금지 표지들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정동이 발생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작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대신 ‘답답함’, ‘미안함’, ‘뻔뻔스러움’, ‘은밀한 해방감’ 같은 미세한 감각들을 일상의 장면 속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몸에 직접적인 진동을 전달한다. 이는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이 말하는 바, 수필이 의미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사건이 다시 일어나도록 배치된 언어의 장이라는 점을 충실히 실천한 결과다. 금지는 규범이 아니라 압력으로, 자유는 이념이 아니라 숨 쉴 틈으로 제시되며,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독자 각자의 삶 속 규칙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정동적 핵심이 응축되어 있는 부분은 “세상의 질서는 내 몸에 맞지 않지만 강제로 입어야 하는 기성복과 같아서 늘 답답하여 벗어 던지고 싶어진다.”고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질서는 개념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으로 인식된다. 미셸 푸코가 “권력은 금지하기보다 몸을 훈육한다”고 말했듯, 작품 속 금지 목록은 법률적 텍스트가 아니라 몸을 조이는 감각의 총합이다.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하면서도 작가는 자유의 경계를 논리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욕망이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도망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이브의 신화를 호출하는 장면은 일탈을 죄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기원적 충동으로 확장하는 사유의 도약이다.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는 금지를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금지와 욕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적 긴장을 정동으로 보존한 수필이다. 이는 현대수필이 도덕적 교훈이나 사회 비평을 넘어, 삶의 규칙을 몸으로 다시 묻는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성취라 평가할 수 있다.

 

Ⅲ.

 

김봉선, 박찬익, 이미숙, 장충무 작가의 수필 네 편이 도달하는 공통의 성취는 분명하다. 이들은 삶을 해석하거나 교훈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에 독자를 노출시키는 언어의 배치를 선택한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순간, 금지가 신체를 압박하는 순간, 사소한 일상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마다 텍스트는 의미를 유예하고 정동의 파동을 남긴다. 이는 질 들뢰즈가 말한 “사건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는 정의를 문학적으로 실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네 작품 모두에서 주제는 미리 주어지지 않으며, 읽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읽고 난 이후에도 완결되지 않은 채 지속된다.

이 작품들이 주목되는 이유는 주제의식의 선명함이나 메시지의 설득력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말해지기 이전의 감각,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를 언어의 배치 속에 보존함으로써 독자의 신체에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등꽃>은 자연을 의미화하지 않고, 반복 속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간의 진동으로 배치함으로써 사건을 생성하고, <아파트 114동>은 익명적 공간을 삶의 감각이 스쳐 가는 장으로 전환시킨다. <금지의 금지를 소망한다>는 규범과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을 도덕의 문제로 봉합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정동의 현장으로 열어 보이며, <머리카락>은 소실과 생성의 과정을 순수사건으로 포착한다. 이 네 편의 수필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대신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배치된 언어의 장으로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들은 개별 텍스트를 넘어, 본격수필이 지향하는 하나의 미학선언으로 서로를 호명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수필들이 개인의 체험을 사적인 고백으로 소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리카락의 탈락, 금지의 압력, 신체와 시간의 변화는 ‘나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통과해야 할 존재 조건의 표면으로 확장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작가는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도록 배치하는 자”가 될 때, 텍스트는 비로소 독자의 삶 속으로 이행한다. 이 네 편의 수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성공한다. 설명을 거부하고, 판단을 유보하며, 대신 독자의 신체와 감각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독해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차원에서 작동하며, 독자는 작품을 이해했다기보다 하나의 사건을 통과한 존재로 남는다. 이때 수필은 완결된 의미의 그릇이 아니라, 읽힌 이후에도 계속 진동하는 열린 장이 되어,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재발생한다.

이 작품들은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의의를 가진다. 수필은 더 이상 감정의 정리나 삶의 교훈을 제공하는 장르가 아니라, 존재가 흔들리는 순간을 현재화하는 사건의 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편의 수필은 의미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오래 지속되는 힘을 획득한다. 읽는 순간보다 읽고 난 이후에 더 깊이 작동하는 이 정동의 잔여야말로, 본격수필을 근간으로 한 현대수필이 획득한 가장 중요한 미학적 성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취는 수필을 설명의 장르에서 체험의 장르로, 회상의 문학에서 생성의 문학으로 이행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기능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