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화의 수필 흑적(黑迹)의 문체, 파조(破調)의 미학'
- 균열을 통과하며 탄생하는 진실의 소리: 송명화의 <흑적>을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낙동강 하구/ 삼각주/ 퇴적물이 모여 태어난/ 작은 섬/ 총성과 연기/ 강을 건너오던 날/ 전쟁에 버려진 작은 손(孫)들이 흘러들었다// 갈대숲 사이/ 웃음과 눈물/ 서툰 기도와 조용한 꿈이/ 강바람에 흩날리던/ 외로운 아이들의 안식처// 1959년 태풍 사라는/ 아이들을 쓸어갔고/ 세상은 아이들을 잊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린 생명들/ 진우도는/ 잊힌 이름들을 품은 채/ 그날을 증언하며 홀로 서 있다.
-남현설의 <진우도> 전문
Ⅰ.
수필의 문체는 본래 조화와 균형의 미를 지향한다. 문장은 유려하게 이어지고, 정서는 절제되어 있으며, 사유는 매끄럽게 흐른다. 이러한 조화로운 구조 속에서 수필은 독자에게 안정된 서정적 경험을 제공하며, 사유의 질서를 확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장은 종종 자연스러운 호흡을 가지고, 서사의 흐름은 일정한 리듬으로 조율되며, 독자는 문장의 균형 속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이러한 특성은 수필이 갖는 미적 전통의 핵심으로, 감정과 사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독자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장치이다. 헤르만 헤세는 “문학은 삶의 균열 속에서 진동하는 진실을 포착하는 예술이다.”라고 했다. 수필은 단순한 서사적 조화나 감정의 재현을 넘어, 삶의 불협과 균열, 비극적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정서적 진동을 드러내야 한다. <흑적>에서 장록 열매, 진우도, 전쟁고아 사건 등이 보여주는 문체적 파조와 헤세의 ‘균열 속 진실’이 서로 맞닿는다.
그러나 삶 자체는 결코 완전한 균형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은 격렬한 감정과 예상치 못한 사건, 그리고 사유의 비약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수필이 삶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할 때, 단순히 조화로운 문장과 절제된 감정만으로는 그 복합성과 긴장을 담아내기 어렵다.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는 오히려 생기가 사라지고, 문체는 관념적 틀 속에 갇혀 정적인 형식으로 굳어버리기 쉽다. 삶의 불안정성과 감정의 진폭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장은 독자에게 형식적 아름다움만을 전달할 뿐, 실제 경험과 사유의 깊이는 담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수필이 진정으로 살아 숨 쉬기 위해서는 때로 그 조화를 깨뜨려야 하며, 바로 그 깨짐의 자리에서 수필의 진정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깨짐의 순간이 바로 파조(破調)이다. 파조란 단순히 문체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라, 완벽한 질서 속에서 일부러 균열을 만들어내는 미적·사유적 전략이다. 파조의 문장은 기존의 조화로운 리듬과 호흡을 일부러 단절시키고, 정서와 사유의 진동이 문장 표면으로 솟구치게 한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무질서가 아니라, 균형 속에 내재된 긴장과 생명력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문체가 갖는 힘과 깊이를 독자에게 실감나게 전달한다.
송명화는 문학이 사회정화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재구성하고 끊임없이 재배치하는 아장스망의 작가다. 송명화의 수필 <흑적>은 2025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러한 파조적 미학이 가장 섬세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흑적>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의 기록이나 애도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문장과 사유, 감정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변형함으로써 독자가 직접 감정과 사유의 파열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녀의 문장은 조화롭지 않고, 호흡이 불규칙하며, 의미가 순간적으로 비약한다. 그러나 바로 그 파열과 비약 속에서, 독자는 사건 자체보다 그것이 작가 내면에서 일으킨 정동적 울림을 경험한다. 문체의 균열은 감정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감정과 사유의 파동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파조는 수필 문체에서 단순한 형식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 효과를 생성하고, 문체적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기제이다. 문장의 파열과 리듬의 불협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윤리적, 정서적 진동을 강화하며, 독자가 수필을 단순한 읽을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가 함께 흔들리는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송명화의 〈흑적〉이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파조적 문체가 사유의 깊이와 감정의 진폭을 동시에 구현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현대인의 비정한 일면을 비판하면서 타자의식과 생명의식의 중요성을 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조는 조화를 깨뜨리는 순간에 비로소 수필의 진정성과 미학적 생명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문체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예라 할 수 있다. 송명화는 수필 <흑적> 속에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한껏 내장시켰다. 철학적 품위와 냉철한 앙가즈망으로 날카로우면서 부드러운 산문을 쓰는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명화 교수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Ⅱ. 문체란 무엇인가
규범에 맞으면서도 일정한 논리적 체계를 지닌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규범에 맞지 않거나 글에 논리성이 결여될 경우, 자기가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읽는 이가 그 글을 통해 받아들이는 바가 일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법에 맞고 논리 정연한 글만 쓰면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만족할 만큼 전달되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어법에 맞는 문장은 언제나 여럿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모른다”란 말을 “나는 모릅니다”라고도 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모른다니까요”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체는 다양하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어느 것이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언어적 대응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문체론의 중요성이 놓여 있다.
기존 문체론의 갈래 구분은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따온 것이다. 이태준은 이 책에서 문체를 간결체, 만연체, 강건체, 우유체, 화려체, 건조체 등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간결체와 만연체는 문장의 길이에 따라 나눈 것이고, 강건체와 우유체는 글쓴이의 어조가 강경한가, 아니면 부드러운가를 가지고 나눈 것이며, 화려체와 건조체는 수사법을 많이 구사하는가 적게 구사하는가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문체의 변증법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이태준이 언급한 문체들은 모두 개성적인 문체에 해당된다. 유형적 문체라는 개념은 아예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의 글은 보편성과 개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글 쓰는 이는 두 가지 문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종합하여야 하는데, 이태준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글의 문체는 타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과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다. 곧 이원성을 지니게 마련인 것이다. 앞의 것을 유형적 문체라 하고, 뒤에 것을 개성적 문체라 한다. 유형적 문체에는 시간과 공간에 따른 문체, 계층과 계급에 따른 문체, 글의 갈래에 따른 문체 등이 포함되지만, 이 중에서 가장 갈래가 많고 복잡한 것은 세 번째인 글의 갈래에 따른 문체라고 하겠다. 문학이 현실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작가가 현실을 파악하는 눈과 태도에 따라 표현되는 내용이 달라진다. 문학적인 글의 문체는 복잡하고 또 전문적인 지식과 감각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송명화의 수필 <흑적>의 문체에서 나타나는 파조미학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헤겔은 “예술은 완전한 형태 속에서 불완전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송명화 수필 속 파조미학을 다각도로 분석할 때, 헤겔의 이 말이 핵심적 의미를 제공한다. 감정의 리듬 파괴, 사유의 비약, 불협의 미, 이미지와 상징의 겹침, 시간과 공간의 파열 등 <흑적>의 다섯 가지 파조적 특성은 모두 완전한 문장 질서 속에서 의도적 불협을 드러내어 생기를 부여한다는 헤겔의 미학적 통찰과 연결된다.
수필창작의 핵심은 단순히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언어 속에서 새롭게 의미화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수필 <흑적>은 낙동강 하구의 섬 ‘진우도’에 얽힌 비극적 역사를 섬세한 작가의 감성과 아장스망 그리고 앙가주망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 수필은 1959년 태풍 사라호로 인해 전쟁고아 280여 명이 희생된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호명한다. 이 글은 단순한 추모문이나 르포가 아니다. 송명화의 시선은 ‘기억의 재현’보다 ‘의미의 생성’에 닿아 있다. 그녀는 잊힌 장소의 침묵을 해석하기보다, 그 침묵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작동하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감동을 준다. 송명화의 수필 <흑적>은 조화로운 문체의 미학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문장은 매끄러움보다 진동을, 질서보다 균열을 선택한다. 감정이 언어의 리듬을 앞질러버리는 순간, 문장은 더는 정제된 사유의 도구가 아니라 상처의 흔적이 된다. 바로 그 깨진 호흡과 불안정한 어조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감정의 결을 만난다. 〈흑적〉의 언어는 흘러가는 서사가 아니라, 멈칫하며 부서지는 문장들의 연쇄이며, 그 파열의 리듬이야말로 송명화 문체의 생명이다. 그녀는 조화의 문장을 버리고, 흔들림의 문장으로 삶의 진실에 접근한다. 이 흔들림, 즉 파조의 문체가 곧 송명화 수필 <흑적>에서 만날 수 있는 그녀의 윤리이자 미학이다.
Ⅲ. <흑적> 문체에 나타난 파조 미학
- 균열을 통과하며 탄생하는 진실의 소리
(1) 감정의 리듬을 깨뜨리는 문장
‘감정의 리듬을 깨뜨리는 문장’은 송명화 문체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힘, 즉 정동이 언어를 압도하는 순간의 미학을 드러낸다. 그녀의 문장은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기보다, 감정이 언어의 틀을 직접 밀어내고 균열을 만들어내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문장의 호흡은 일정하지 않고, 비유는 갑작스럽고, 어조는 예기치 않게 뒤틀린다. 이러한 파조적 문장은 독자를 안정된 서정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중심 진동부로 끌어들인다. 즉 문장이 깨지는 순간,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의미는 조화가 아닌 파열을 통해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서술자의 감정이 ‘정리된 감정’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감정’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게 깨진 리듬은 서정의 매끄러움 대신, 감정의 생생함, 급박함, 혼재성을 드러내며, 수필이 삶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의 맥박을 전달하는 장르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결국 감정의 리듬을 깨뜨리는 문장은 수필 문체를 생동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언어의 뒤편에서 맥동하는 정동의 진동, 즉 인간적 진실을 직접 마주하도록 이끄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의 첫 문장은 이미 조화의 세계를 떠난다. <흑적>의 첫 문장은 독자를 단숨에 안정된 세계 바깥으로 내몬다.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이 문장은 감정의 분출이 문법보다 앞서고, 사유의 정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동의 폭발이 먼저 터진다. 일반적으로 수필의 첫 문장은 독자를 정돈된 사유의 공간으로 인도하지만, 송명화는 이 문단에서 그 관습을 과감히 파기한다. ‘울컥대는’이라는 동사는 서술의 균형을 깨뜨리는 불규칙한 맥박처럼 작용하며, ‘각혈 같다’는 돌출된 비유는 아름다움의 틀을 벗어난 불안한 생리적 이미지로 독자를 휘감는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급박하게 호흡하고, 감정의 리듬이 언어의 질서를 압도한다. 이러한 구조적 긴장은 문체의 파열을 통해 내면의 격렬한 동요를 실감 나게 드러낸다.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누구는 와인을 떠올리고 누구는 공포영화를 떠올리며, 누구는 버리고 싶은 기억을 호출한다. 누가 뭐라든 척박한 땅에 당당히 자리 잡고, 키를 키우고 가지를 쳤다. 저 무시무시한 암적의 열매를 맘껏 매단 장록을 여기서 만난 것은 우연일까. 가슴을 뜯는 아픔을 되짚어 찾아온 어눌한 글쟁이의 마음이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 <흑적> 중에서
문장은 호흡을 잃고, 감정은 문법보다 앞선다. 서술어는 독자의 리듬을 흔들고, 비유는 현실의 묘사가 아닌 감정의 폭발로 이어진다. 이때 문장은 더는 질서의 언어가 아니라 정동(情動)의 언어, 즉 감정의 떨림 자체가 된다. 그것이 바로 문체적 파조다. 송명화의 문체는 매끄럽지 않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때로는 거칠다. 문장 사이의 연결이 불규칙하고, 단문과 비약이 빈번히 나타난다. 그러나 그 불협의 리듬이야말로 <흑적>의 생명이다. 송명화의 문장은 완벽한 균형을 거부하며, 감정의 진폭에 따라 리듬을 흔든다. 정제된 언어의 껍질을 깨뜨리고, 생생한 정동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 독자를 감동의 고지로 끌어올린다.
여기서 ‘파조’는 단순히 리듬의 깨짐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를 밀어내는 순간, 즉 사유의 형식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의 무게가 표면으로 솟구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송명화는 언어를 통해 감정을 재현하지 않고, 감정의 폭발 속으로 언어를 던져 넣는다. 그 결과 독자는 정제된 표현의 아름다움 대신, 감정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살아 있는 문체를 마주하게 된다. 첫 문장은 이처럼 수필의 평온한 리듬을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써, 이후 전개될 애도의 서사가 감정의 균열 위에 세워질 것임을 예고한다. 결국 <흑적>의 발단부에서 드러나는 파조는, 정제된 사유를 거부하고 생생한 감정의 파열음을 문체로 전환한 작가의 윤리적 선택이자, 그녀의 문체가 지닌 근본적 리듬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2) 사유의 비약과 문장의 단절
송명화 수필 문체의 가장 내밀한 리듬이자, 감정이 사유를 초과할 때 발생하는 문학적 사건은 ‘사유의 비약과 문장의 단절’을 보여준다. 그녀의 문장은 논리적 연쇄를 거부하고, 때로는 의미의 간극을 의도적으로 남겨둠으로써 사유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단절은 단순한 구성의 미숙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밀도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문장은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며, 그 사이의 여백에서 독자는 감정의 진동을 듣게 된다. 이로써 사유는 선형적 전개가 아닌 ‘도약적 인식’의 형태로 변한다. 송명화의 문체에서 ‘비약’은 사고의 공백이 아니라 감정의 압축이며, ‘단절’은 의미의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성 공간이다. 이러한 파조적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논리의 길이 아니라 감정의 틈을 따라 읽게 만들며, 수필을 사유의 서사가 아니라 ‘감정의 사건’으로 바꾼다. 결국 사유의 비약과 문장의 단절은 송명화가 구축한 내면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파열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윤리적 미학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이 열심히 실어 나른 토사가 섬을 살찌웠는지 섬의 흰 뱃구레가 몇 년 전보다 넓어진 듯하다. 사라호 태풍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운 좋게 섬을 나섰던 생존자의 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진우도를 찾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작가들과 함께 서둘러 이곳을 다녀온 뒤로 이 섬은 자주 내 생각 속에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찾아드는 무의식의 장에서,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는 큰바람 속에서,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모래폭풍 속에서, 한번은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 인원을 어림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다녔다. 다시 오리라 하였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였던 건 그 아픔의 심연을 헤아리기 어려워서다.
이 문단은 사유의 비약과 문장의 단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례다. 송명화는 시간적, 공간적 순서를 따르는 평이한 서술 대신, 기억과 상상, 과거와 현재, 현실과 무의식적 상상을 자유롭게 교차시킨다. 첫 문장의 ‘낙동강이 열심히 실어 나른 토사가 섬을 살찌웠는지’에서 시작하여, 이어지는 생존자의 딸의 증언, 작가들과의 탐방, 무의식 속 상상의 장, 폭풍 속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문장은 여러 층위의 사건과 사유를 한꺼번에 포개며 점프한다. 문장 구조 역시 길고 꼬여 있으며, 쉼표와 접속사를 통해 흐름을 유지하려 하지만, 감정과 기억의 압력이 이를 끊임없이 밀어낸다. 이러한 단절과 비약은 독자가 논리적 순서를 따라가며 이해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작가 내면에서 솟구치는 감정과 윤리적 고뇌를 동시에 체험하도록 하는 장치다. ‘무의식의 장에서’,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라는 구절은 현실적 지리와 심리적, 상상적 공간을 갑작스럽게 연결함으로써 독자에게 정서적 긴장과 몰입을 유발한다. 결국, 이 문단은 송명화 문체가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서사가 아니라, 사유가 파열하고 감정이 분출하는 순간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파조적 미학의 전형임을 보여준다.
단절의 구조는 사유의 균형을 깨뜨리며, 감정의 방향을 반전시킨다. 이 비약의 리듬 속에서 독자는 작가의 내면이 흔들리는 순간을 체험한다. 그 흔들림이야말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틈, 즉 파조의 현현이다. <흑적>의 문체는 단순한 감정의 폭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를 향한 윤리적 감각으로 나아간다. 송명화는 죽음을 기록하면서 슬픔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슬픔을 견디는 언어의 형식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기억’과 ‘용서’의 가능성을 연다. 위 인용문은 송명화 특유의 사유의 비약이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다. 이 문단은 논리적 연결 대신 정서의 급류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비약은 논리의 불연속이 아니라 감정의 진실을 향한 급진적 도약이다. 문체적으로 볼 때 전복은 의미의 진전을 시간적 서사 대신 정동의 진폭으로 대체한다. 그 결과, 독자는 논리를 따라가는 대신 감정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된다. 송명화의 이런 문장 구조는 사유가 파열음을 내며 성장하는 순간을 보여주며, 바로 그 비약의 틈에서 수필은 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정의 사유’로 다시 태어난다.
(3) 불협의 미, 윤리의 리듬
‘불협의 미, 윤리의 리듬’은 송명화 문체가 지닌 긴장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그녀의 문장은 완결된 조화나 서정적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열음처럼 들리는 문장의 불협화음 속에 인간 존재의 균열과 윤리적 감수성을 새겨 넣는다. 이 불협은 단순한 미적 실험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세계의 불완전성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문학적 양심의 결과이다. 송명화의 문장은 감정의 진폭이 클수록 더 거칠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독자는 생의 진실에 맞닿는다. 즉 그녀의 글에서 ‘아름다움’은 매끄러움이 아니라 어긋남에 있다. 문장의 리듬이 깨질 때, 언어는 윤리적 각성을 촉발하며, 독자는 의미의 균열을 통해 타인의 상처를 감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불협의 미’는 감정의 불안정성을 포용하는 미학이며, ‘윤리의 리듬’은 그 불안정성을 통해 타자를 향해 열리는 책임의 문체다. 송명화의 수필은 바로 이 두 리듬, 불협과 윤리라는 양가의 가치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획득한다.
송명화의 수필은 흔히 ‘윤리의 문체’라 불린다. 그 윤리는 규범의 윤리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 앞에서의 떨림으로서의 윤리다. <흑적>에서 파조는 단지 문체의 미적 전략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감응의 구조로 작동한다. 윤리적 리듬은 작가의 사유 속에서 드러난다. 아이들의 죽음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 처리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문장 곳곳에 스며들며, 독자는 안내판의 무감각함과 작가 내면의 책임감 사이를 오가며 긴장한다. 불협의 미와 윤리적 긴장의 결합은 단순한 감정 호소가 아니라, 독자가 사건의 심각성을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구조로 작동한다. 문장은 불완전하고 거칠지만, 그 거칢 속에서 사건의 윤리적 무게와 인간적 비극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태풍 사라가 진우도를 들이켰을 때, 이곳에 깃든 전쟁고아 280여 명이 몰살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듯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내판에 간단하게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인명사고가 발생 철수했는데’라고 적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진우도가 거대한 판에 눌려서 길게 늘어진 커다란 봉분처럼 보인다. 그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공할 만한 태풍의 위력이야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제대로 기록되고 제대로 추모되고 있는지…. 간단하게 ‘인명사고’라 눙쳐놓으니 처음에 나는 한둘인 줄 알았다. 안내판의 감정 없는 글자들이 내 목을 죈다.
이 문단은 송명화 문체에서 불협의 미와 윤리의 리듬이 동시에 발현되는 대표적 장면이다. 첫 문장에서는 ‘세상이 정지된 듯했다’는 단순한 서술을 넘어, 사건의 충격과 내면적 공포가 문장 전체를 압도한다. 이어지는 안내판의 사실적 서술과 비교적 평이한 문장, “간단하게 ‘인명사고’라 눙쳐놓으니”은 앞선 감정의 폭발과 대비되면서 불협화음을 만든다. 이러한 문장의 불협은 문법적·리듬적 조화와 의도적 균열 사이에서 발생하며, 독자로 하여금 감정의 긴장과 현실의 무미건조함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게 하며, 이는 송명화 수필에서 문체의 불협이 윤리적 사유와 만나 독자의 정서를 흔드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독자는 안내판의 냉정한 글자와 작가의 고통스러운 심리적 반응 사이에서 ‘읽는 경험’이 아니라, 감각하고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파조적 문체와 불협의 미, 윤리의 리듬은 단순한 형식적 장식이 아니라, 수필이 감정과 윤리의 진동을 전달하는 핵심적 성취임을 증명한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나 복원이 아니라, 신체적 감응의 차원이다. 사유와 육체가 뒤섞이는 순간, 문장은 조화의 질서를 벗어나 불협의 리듬, 타자의 언어로 변한다. 그것이 송명화 문체의 윤리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는 언제나 나의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다. 타자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나의 언어를 깨뜨리고, 나의 문장을 어긋나게 만든다. 송명화의 파조는 바로 그 ‘타자의 침입’을 허락하는 문체의 개방으로 읽힌다. 그녀의 수필은 감정의 폭발을 넘어, 타자를 감내하는 윤리적 진동을 보여준다. 문장의 파열은 곧 윤리의 리듬이며, 파조는 그 윤리의 형식이다. 이러한 파조적 문체는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미학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 완벽히 다듬어진 문장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진실을 감춘다. 반면 파조의 문체는 상처와 불협을 드러내지만, 그 안에서만 인간의 목소리가 들린다. 송명화의 〈흑적〉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애도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도의 언어가 견딜 수 없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며 흔들리기 때문이다.
단순한 회상이나 서술적 재현을 넘어, 기억이 행위적, 신체적 차원으로 확장됨을 보여줌으로써 감동을 유인한다. 이미지를 통해 감정과 사유가 문법적 질서를 넘어 폭발하는 순간을 형상화함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견인한다. 문장은 조화롭거나 매끄럽지 않고, 상징적, 정동적 충격을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 특히 비유는 죽음과 애도, 그리고 타자와의 윤리적 연대가 언어 속에서 직접적으로 체화되는 순간을 드러낸다. 문학적 효과로는, 독자가 사건 자체보다 작가 내면의 흔들림과 윤리적 반응을 경험하게 만들며, 언어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를 동시에 매개하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즉 이 문장은 파조적 문체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 기억의 신체화, 감정의 직접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수필의 미학과 윤리를 결합하는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겠다.
(4) 이미지와 상징의 겹침
수필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겹침은 단순한 장식적 수사나 시적 기교가 아니라, 문학적 사유와 정서 전달의 핵심적 장치로 기능한다. 송명화의 <흑적>에서는 장록 열매의 검은 즙이 단순한 식물 묘사를 넘어, 전쟁고아의 희생과 작가의 윤리적 분노를 동시에 상징한다. 이러한 중첩된 이미지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상징, 사건과 감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게 만들며, 문장의 리듬과 사유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흔든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단순히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내포하는 역사적·윤리적, 정서적 의미를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된다. 이처럼 이미지와 상징의 겹침은 수필 문체의 파조적 특성을 강화하며, 글을 통해 전달되는 사유와 감정의 깊이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현대수필이 갖는 미학적 성취와 독자적 경험을 동시에 보장한다.
장록 열매를 따서 꽉 쥐어짠다.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원이름은 미국자리공인데 귀화식물이다. 예전에 이곳 선주가 진우도에 이것이 많이 산다고 일러주었다. 씨앗이 미군의 보급물품에 묻어 진우도에 들어온 것일 터이니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 대여섯 살짜리부터 있었다는데 피난길에 부모를 놓친 아이도, 폭격 속에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을까. 구걸하며 떠돌다 이곳으로 흘러든 아이도 있었겠지. 악몽에 시달리기도, 날마다 먼 바다를 보며 ‘엄마아, 아부지이….’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이 문단에서 송명화는 현실적 묘사와 상징적 이미지를 동시에 겹쳐 파조적 효과를 만든다. 첫 문장은 식물의 실제적 행위, 장록 열매를 쥐고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여주지만, 곧 이어지는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라는 문장은 식물의 이동과 아이들의 생존을 상징적으로 연결한다. 장록 열매의 ‘검은 즙’은 단순한 색채 묘사가 아니라, 전쟁고아의 희생, 사회적 무관심, 작가의 윤리적 분노를 동시에 환기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로 기능한다. 문장 구조 역시 평이하지 않다. 사실적 정보, 역사적 맥락, 상상적 재구성이 한 문단 안에서 중첩되며, 독자는 현실과 상징, 감정과 사유 사이의 간극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 겹침은 문장 리듬을 고의적으로 흔들어, 독자가 단순히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정서적, 윤리적 차원에서 동시에 느끼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이 문단은 <흑적>에서 파조가 단순한 문장 깨짐이 아니라, 상징적, 현실적 의미가 중첩되어 문학적 긴장과 감동을 생성하는 핵심 장치임을 보여준다.
(5) 시간과 공간의 파열
수필에서 시간과 공간의 파열은 사건과 기억, 현실과 상상이 한 문단 안에서 자유롭게 겹치면서 문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핵심적 장치이다. 송명화의 <흑적>에서는 낙동강, 진우도, 태풍 사건, 작가의 회상과 상상이 한 흐름 속에서 중첩되며, 독자는 선형적 시간과 안정적 공간 감각을 잃는다. 이러한 파열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사건의 역사적, 윤리적 무게와 내면적 공포를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독자는 문장을 따라가면서 현재의 탐방과 과거의 비극, 상상의 공간을 동시에 경험하며, 사건과 감정, 윤리적 사유가 뒤엉킨 복합적 현실을 직감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파열은 수필 문체의 파조적 성격을 극대화하며, 독자에게 사건의 심리적, 윤리적 진동을 직접 전달하는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입증한다.
낙동강 하구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다. 가덕도가 그중 으뜸인데 가덕과 다리로 이어진 섬 중의 섬, 눌차도에 와 있다. 하오의 여백과 바다의 들숨과 날숨을 품은 정거마을을 지나고, 갈맷길을 걸었다. 감탄도 평화로움도 낯선 감정인 것은 진우도를 찾아온 길이라서다. 언덕을 오르니 진우도 안내판이 몸을 드러낸다. 그것을 애꾸처럼 만든 장록 가지를 정리하고 엉긴 얼룩을 물휴지로 닦는다. 방금 찍은 낙인처럼 선명한 핏물을 정성껏 닦는 것과 묵념 외에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근거리에 기다란 섬이 해파리처럼 떠 있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이 예문은 송명화 수필 <흑적>에서 시간과 공간의 파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례다. 문장은 물리적 이동과 공간적 묘사에서 출발하지만, 곧바로 내면적 회상과 역사적 사건, 상상적 사유로 비약한다. 예를 들어, ‘갈맷길을 걸었다’라는 현재적 행동과 ‘진우도를 찾아온 길이라서다’라는 심리적 회상, 이어서 안내판과 장록 가지 정리라는 사실적 현재, 그리고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라는 상징적, 시간 초월적 성찰이 한 문단 안에 겹친다. 공간적 이동, 낙동강, 가덕도, 눌차도, 진우도와 시간적 층위, 현재의 탐방, 과거 사건, 역사적 맥락이 동시에 제시되면서 독자는 선형적 시간 감각과 안정적 공간 인식을 상실한다. 이러한 파열은 단순히 문장 흐름을 깨뜨리는 장치가 아니라, 독자가 사건의 윤리적, 정서적 긴장과 내면적 공포를 동시에 체험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문장의 비선형적 흐름과 중첩된 공간, 시간은, 파조적 문체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 감정과 윤리적 사유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도구임을 보여준다.
Ⅳ.
- 균열 속의 진정성
톨스토이는 “문학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읽는 이를 삶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다.”고 했다. 독자가 파조적 수필을 통해 체험하는 윤리적, 정서적 긴장과 문학적 성취를 강조할 때, 톨스토이의 이 말이 적합하다. <흑적>의 파조적 문체는 독자를 단순한 사건 서술 너머로 안내하여, 역사적 비극과 인간적 고뇌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만드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파조는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문체가 감정과 사유를 버티기 위해 선택한 생존의 형식이며, 진실에 다가가는 리듬이다. 조화의 문장은 정지된 세계를 말하지만, 파조의 문장은 살아 있는 세계, 흔들리는 인간, 멈추지 않는 사유를 말한다. 수필의 문체는 파조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완벽한 조화를 깨뜨릴 용기를 가진 문체, 균열을 견디는 언어만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송명화의 <흑적>은 바로 그 증거다.
조화의 문학을 넘어, 균열의 문학, 파조의 미학이 우리 수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필의 문체는 파조를 통해 살아난다. 송명화의 <흑적>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조화롭기 때문이 아니라 조화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은 매끄러움을 거부하고, 감정의 파열과 사유의 진동을 문체로 옮겨온다. 그 파열의 리듬 속에서 독자는 인간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파조는 결함이 아니라 진실의 리듬이다. 균열이 없는 문체는 감정이 없는 문체이고, 균열을 감당하는 문체만이 윤리적이다. 송명화의 수필은 바로 그 균열의 윤리, 즉 파조의 미학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흔들리며 쓰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문학적 기교를 넘어, 존재와 사유의 깊이를 향한 윤리적 성찰이기도 하다. 알베르트 카뮈가 “진실은 가장 고독한 상태에서 발견된다.”고 말했듯, 균열과 흔들림 속에서만 인간의 진실이 드러난다.
또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이 가진 상처의 깊이를 측정할 줄 안다.”고 하여, 상처와 파열 자체가 문체의 생명력이 됨을 상기시킨다. 송명화의 문장은 이 상처를 직시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균열을 마주하게 한다. 한편 일본의 다자이 오사무는 “진실로 쓰려면 먼저 자신을 찢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송명화의 문장 속 파조의 리듬과 정확히 맞닿는다. 문체 속 균열을 견디는 것은 단순한 표현의 선택이 아니라, 삶과 존재를 온전히 응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흑적>이 우리에게 남기는 울림은 문체의 완벽함이 아니라, 균열을 통과하며 탄생하는 진실의 소리라 하겠다.
▼권대근
남해 출신, 88년 동양문학으로 등단, 수필가, 평론가, 번역가,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정독도서관 문예창작반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