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닿지 못하는 날의 무게/황진숙
평온하다. 고통의 흔적은 지워졌다. 시퍼렇던 낯빛과 입술이 본래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생체 신호를 나타내는 기계장치도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도 없다. 하얀 침대보에 반듯하게 누워 떠날 채비를 마쳤다. 환자복에서 수의로 갈아입은 오빠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다.
요동치는 생의 곡선이 사라진 육신은 적막하다. 떠나려는 오빠를 받아들인다. 모니터 위로 그어지는 일직선을 보며 미친 듯이 울었던 원통함을 내려놓는다. 가지 말라고 매달리던 절망을 가라앉힌다. 목숨을 주었다가 도로 뺏어가느냐며 신을 향한 원망 또한 거둬들인다.
그런들 맥없이 꺾인 스물다섯의 한을 어찌할까. 고작 한 살 많은 오빠로 가난한 집 맏이로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했다. 끝없이 달리고 싶다던 마라토너의 꿈을 접고 집에 보탬이 되고자 취업해서 타지로 떠나던 날이었다. 이미 몸은 통증에 잠식되었는데 애써 웃음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장례식장으로 눈도 못 떠보고 가려니 얼마나 한스러울까. 고통스럽다는 한마디의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살고 싶다는 애원의 눈빛도 내보이지 못했다. 잘 있으라는 인사마저 남기지 못했으니 애달프고 애달프다.
그리 떠나가려고, 피붙이의 정을 떼려고 투병이 처절했나 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에 속이 타들어 가던 날들. 하루 좋아지면 사흘 위중하고 이틀 잠잠하면 나흘 죽음의 문턱에서 헤맸으니, 이제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길을 잃을 일은 없겠구나. 고통받을 일 없이 정해진 곳으로 가겠구나. 너무나 짧았기에 살아보지 못한 시간은 저 너머에서 보내라고 염원을 담는다. 이생의 아픔일랑 잊고 부디 편히 가기를 빌어본다.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다. 가는 길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보내주고 싶어 눈물을 닦는다.
오빠는 그렇게 영원의 세계로 떠났다. 살면서 종종 오빠 생각이 났다. 그리움은 과거에서만 오지 않는다. 가 닿을 수 없는 미래에서도 온다. 남편과 소소한 일로 다투거나 화가 날 때면 가슴 한쪽이 싸해졌다. 친정으로 달려가 푸념을 늘어놓으면 마주 앉아 묵묵히 들어주고 맞장구치며 다독여줄 오빠의 자리가 비어서이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남편 흉을 함께 봐주며, 의기투합하여 우애를 다질 그가 없어 비감해졌다. 남편을 불러 처음에는 훈계조로 나무라다가, 나중에는 주거니 받거니 술 한잔 기울이며 의형제가 돼 버리는 남자들의 세계가 환영처럼 스쳐 갔다.
이미 겪은 과거라서 올 수 없는 내일은 애틋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알아채는 그리움이 감각으로 찾아든다. 시골집에서 냇내가 흘러나올 적엔 잠시 상념에 잠기곤 한다. 후각을 파고드는 내음이 기어이 먼 기억을 소환한다. 군불을 때보겠다며 징징거리는 내 손에서 위험하다고 부지깽이를 빼앗는 오빠의 손길이 발목을 붙잡는다.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고향 집을 지키고 있겠지. 부모님 뒤를 이어 과수원에서 따낸 향내 가득한 복숭아를 동생들 먹이려고 박스째 쌓아놓았을 테지. 이제나저제나 동생들 오기만을 기다리며 고샅을 내다보는 오빠의 허연 귀밑머리가 눈에 선하다.
장성한 큰 조카의 어깨를 토닥이며 남자답게 군 생활을 마치고 오라며 건네는 고모로서의 격려나, 친구같이 지내던 딸이 시집간다는 소식에 서운해하는 올케에게 건네는 시누로서의 위로가 모두 다 아득하기만 하다.
저물녘이 되도록 종일 온기가 깃들지 못한 빈 가슴이 허허롭다. 함께한 기억으로 덮기엔 가 닿지 못하는 날의 무게가 너무나 버겁다. 이렇게 그가 떠난 날이면 번져오는 슬픔으로 깊게 가라앉는다. 제대로 된 유품 하나 없이 초라하게 살다 간 그의 생이 서러워 가슴이 시리다. 생전에 남긴 몇 편의 삽화에 기대 오빠를 추억하는 마음이 하염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달랠 길 없어 덜어낼 수 없는 무게가 속절없다.
저 멀리 달이 떠오른다. 희붐한 달빛이 마냥 고적하다. 한참을 무연히 바라보며 홀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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