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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리 전파사/황진숙

에세이향기 2026. 6. 12. 09:34

 

 

마음 수리 전파사/황진숙

 

 

 

 

 

뉘 집 충복이었을까. 하루를 보필하는 이들이 골목의 귀퉁이에 모여들었다. 정박 중인 전파사에 몸을 실었다. 플러그에 접속하던 이력은 먼지로 뒤덮였다. 귀환할 거처도 복귀할 항로도 없다. 항해일지에 써 내려갈 동력마저 상실했다. 일상의 좌표를 잃어버린 채 고장 난 세월을 항해 중이다.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전파사는 이미 만선이다. 온갖 수난으로 먹통이 된 버튼, 혹사당한 이력으로 끊어진 회로, 지지직거리는 잡음으로 생활전선에서 밀려난 기기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다. 삶의 자리를 떠나와서일까. 겹겹이 내려앉은 더께며 빛바랜 모양새가 추레하다. 오가는 행인마저 외면할 정도로 한물간 처지가 옹색하다.

시간은 눈부신 것들을 소멸시키고 유폐시킨다. 가난한 시절 부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배불뚝이 TV가 천덕꾸러기로 나앉는 건, 한순간이다. 적막한 일상을 호령하던 위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존재가치를 부여받은 화면과 소리가 멈춰서일까. 눈요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낡은 운명을 탓하는 걸까. 세간살이의 일원으로 거실에 붙박였다가 거리로 내몰린 비애로 풀죽은 낯빛이다.

주방에서 낙오된 밥솥은 연신 밭은기침이다. 보란 듯이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척척 고봉밥을 내주던 왕년의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마솥의 후예로 뱃구레의 허기를 채워주던 긍지는 달그락거리는 궁기로 전락했다. 화석으로 남은 수증기의 잔상이 희미하게 스쳐 갈 뿐이다. 온몸에 날개를 달고도 애물단지로 추락한 선풍기, 주파수를 수신하는 안테나가 떨어져 외부와 고립된 라디오, 신제품 대열에서 이탈한 구닥다리 전자레인지 등 저마다 품은 꼬깃꼬깃한 사연들이 넘쳐난다. 더는 궁핍한 사연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조차 없어 보인다.

출항을 꿈꾸는가. 한때는 이들도 환호와 귀애를 한 몸에 받았다. 소리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았던 다이얼 라디오는 장롱이나 벽장에 모셔둘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내로라하는 골드스타의 위엄으로 동네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으던 텔레비전은 재산목록 1호였다. 감때사나운 세상살이에 반려의 정도 별리의 정도 없이 내쳐졌지만,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소멸의 끝에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수리공의 손길이 그것이다. 생의 끝자락에 가치를 부여해 주는 마지막 의지처이자 안식처이기도 하다. 드라이버 하나로 헐거워진 시간의 틈새를 조이고 납땜질로 끊어진 동력을 잇는 수리공 손씨. 손대기만 하면 백발백중인 수리 실력이라서일까. 명함의 이름조차 ‘손대기’이다. 낮이나 밤이나 부르는 곳이 있으면 달려나가는 손씨가 있어 지붕 낮은 집들이 모여 사는 시골 동네가 가지런하다.

근동까지 소문이 자자한 그를 찾아 나선 길이다. 돌지 않는 선풍기를 수리하고 싶어서이다. 진즉에 폐기 처분하고 새로 사라는 남편의 지청구에도 쉬이 버릴 수 없었다. 좁다란 방안에서 고된 입시의 여정을 함께 한 딸아이의 단짝이기 때문이다.

제 딴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준비한 입시였다. 사시사철 방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할 정도로 결연했다. 냉기를 싫어하는 탓에, 찜통더위에도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한 채 수험 생활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부모와 상의 없이 내린 결정이라며, 알아서 하라고 냉정하게 대하는 어미에게 서운함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런들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이 오죽했을까. 감싸주거나 다독여주지 않는 미욱한 어미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차라리 짜증을 부리고 투덜거렸으면 이리 자책으로 남지 않았을 텐데. 아이의 부름에 즉각 시원한 바람을 내보내는 선풍기만도 못한 소가지가 뒤늦은 후회로 파고든다.

비록 날개는 멈췄지만, 아이의 손때가 묻은 선풍기의 시효를 연장해 주고 싶다. 아무 위로도 되어주지 못한 어미를 대신해 시원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던 기물이 아니던가.

선풍기를 건네받은 손씨는 확실히 노련했다.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뒷면을 분해하더니 바로 처방을 내놓는다. 퓨즈가 나갔다며 서랍에서 부품을 꺼내 교체한다. 하마터면 버려져서 고물로 연명했을 시간이 수리공의 손길로 생명력을 잇는다. 돌고 도는 날개를 따라 추억이 되살아나고 손때 묻은 기억이 복원된다. 회한으로 서늘했던 마음자리가 잠시 혼곤해진다. 상처받은 사연이 수선되고, 치유된 듯 마음마저 가벼워진다.

전파사를 메운 기기들을 둘러본다. 부모님의 유품이라서, 자식들의 추억이 담긴 거라서, 먼저 간 배우자의 애장품이라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깃든 기기로 빼곡하다. 제 몫을 다하고 물러앉은 여유도 퇴물 취급받는 처지의 비애도 수리공의 손끝에서 다독여진다.

질주하는 문명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돌고 돈다. 마지막 주소지에서 새로이 덧입혀진 윤기로 그네들은 또 다른 시간 속에 머무르며 의미를 부여받으리라.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한결 가볍다. 희미한 전파사의 불빛이 따스하게 내려앉는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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