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그랭이질, 시간을 잇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5. 11. 6. 13:26

그랭이질, 시간을 잇다/황진숙

 

 

 

 

적멸의 한 끝에 닿은 부동심이다. 막돌에 치받혀 제 살점이 파이고 깎인들, 허공을 향해 치솟는 굳은 결의다. 기어이 지붕을 떠받들겠다는 강인한 신념이다.

돌덩이와 한 몸이 된 나무가 있다. 덤벙주초를 바닥에 결박하기 위해서라면 깎이고 또 깎이리. 거칠고 모난 돌에 받혀 나무는 숱하게 생살을 도려낸다. 제멋대로인 돌덩이에 굴하지 않고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랭이질로 맞물린다. 울퉁불퉁한 주초가 옴짝할 수 없도록 수직으로 결구를 이룬 후, 그 힘으로 육중한 무게를 버틴다. 누대에 걸쳐 무너지지 않을 뼈대로 기와지붕을 지탱한다.

삽상한 바람이 묻어나는 가을 녘이다. 삭막한 하루에서 벗어나고자 도시를 떠나왔다. 잡다한 일상사야 며칠쯤 뒤로 물리면 그만이다. 부대끼는 숨결 가라앉히며 여유를 찾기엔 옛 고을이 제격이다.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듯 토담에 둘러싸인 의령 오운마을을 찾았다. 크고 작은 돌들이 늘어서서 질서를 이루어내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회색 콘크리트에서 볼 수 없는 우둘투둘한 질감에 절로 손이 가닿는다. 거친 촉각 위로 태곳적 바람이 스치고 금방이라도 옛사람들이 나타나 어우렁더우렁 한담을 나눌 것만 같다.

유난하지도 북적이지도 않아 걸음마저 느려진다. 구불거린 담장 길을 돌아 종중 재실로 쓰이는 고택에 들어선다.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훅 숨을 들이마신다. 온 세상의 무게를 떠받친 기둥이 거기 있었다. 모든 세파를 평정한 곧은 매무새로 우람한 팔작지붕을 받치는 중이다. 볕살이 자리를 잡겠다고 비집고 들어와도, 지나던 바람이 주인인 양 쉬었다 가려고 머물러도 기둥은 요지부동이다. 저를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고택을 옹위하는 기둥이 느껍기만 하다.

직립의 운명이었을 테다. 초록 성성했던 시절의 푸른 호흡은 바스러진 지 오래다. 뿌리를 자르고 잎사귀를 떨군 맨몸뚱이로 막무가내 돌덩이에 맞서는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간다. 목숨을 내건 채 전장에 뛰어든 전사 같다. 가지를 늘이고 열매만 맺으면 그만이거늘, 제 터에서 누릴 안온을 벗어던지고 기둥으로 분한 의지였을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분연히 일어나 온갖 고초를 극복해야 할 사명이었을 게다.

중력을 거스르며 짓눌리는 하중 지탱하느라 무작정 밀어 올렸다. 갈라지고 터진 속살 드러나도록 온 생애를 다 바쳤다. 무수한 한숨 뼛골에 새기며 써 내려간 내력이 까슬하다. 천둥 번개가 엄포를 놓고 태풍이 휩쓸어 버릴 적엔 이고 진 무게로 막아섰다. 뒤엎어 버릴 듯 쏟아붓는 폭설의 으름장에도 꼿꼿이 곧추세웠다. 모진 풍파가 휘몰아칠수록 사력을 다해 버텼다. 밀리면 무너진다는 절박함으로 누옥을 온전히 떠받쳤다. 온갖 난장에도 돌덩이의 기세를 누르며 힘을 모으고 있는 기둥이 묵묵하다.

애당초 기둥이 없으면 한 채의 집채도, 가문도, 한 나라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다. 초가삼간이건 구중궁궐이건 엄청난 무게를 버텨내는 기둥이 있어 오랜 세월을 내려왔다. 돌의 요철에 맞물려 수없이 깎고 다듬는 그랭이질로 단련된 버팀목은 존재만으로도 당당하다. 온몸을 실어 고행 속으로 밀어 넣는 힘이 거침없다. 제아무리 무지막지한 돌덩일지라도 틈새 하나 없이 밀착하는 기둥을 넘어설 길이 없다. 수굿이 바닥에 엎드릴 뿐이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결결이 갈라진 기둥 사이로 우렁한 함성이 흘러나온다. 이 한 몸 헐어 받들겠다는 결기가, 결단코 대적하고야 마는 서사가 수백 년 시공을 건너와 가슴을 뒤흔든다. 어떻게든 직립하겠다는 의지로 잘리고 파이는 고통을 감내한 기둥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짐 지워진 무게의 비애조차 침묵으로 삭인 마음자리가 웅숭깊다. 부딪칠수록 오롯이 저를 내놓는 희생과 헌신으로 담금질한 결과이다.

의병의 고장 의령에서 만난 기둥이 마음을 붙잡아 둔다. 방패막이의 노역을 순명으로 받드는 의로운 존재가 가슴을 두드린다. 처처에 이름난 기둥도 아닐진대, 갈고 파내 보듬은 사연이 단단하다. 지나는 객의 눈길에 아랑곳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우직함으로 역사를 잇댄 궤적이다. 세월이 빗금을 긋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무심의 경지다. 천년이 가도 변치 않을 믿음으로 앞장서는 선봉장이며 수호신이다.

그간 맞부딪치며 숱하게 꺾이고 주저앉았다. 현실에 맞서느라 밥벌이에 점령당한 영혼은 무감각해졌다. 바윗덩어리처럼 불거지는 한숨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고된 노동으로 어둠에 묻힌 내면은 체념의 그림자에 갇혀 무력했다. 살아내야 하는 하루조차 중심을 잃은 육신으로 종종 비틀거렸다. 헤쳐 나가는 뚝심이 부족한 탓에 마음 한 자락 추스르지 못한 나날이었다.

시름에 잠겨 잠시 일상에서 물러나 앉은 참이었다. 은근슬쩍 세상살이의 무게를 기둥에 얹은 채 위로받으려던 얄팍한 속내가 부끄러워진다. 묵중한 기둥의 힘을 빌려서 내 삶을 견고하게 세우고 싶은 소망이라고 애써 핑계를 대보지만, 꼭뒤가 뜨끔거린다.

그러고 보면 그랭이질은 살아가는 이치이며 절대적인 가치이다. 고난과 시련을 끌어안고 기꺼이 나를 내던져야 얻을 수 있는 생의 의미이다. 황동추에 몸을 부딪치며 소리를 부르는 종처럼 부시에게 두들겨 맞으며 불을 일으키는 부싯돌처럼, 혹독하리만큼 나를 내놓는 희생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몸짓이다. 밀어붙이는 외가닥 힘으로 끝 모를 허공에 우뚝 선 무게중심일지니, 그랭이질로 난세를 돌파한 기둥의 궤적이 벼락같은 경구로 와 닿는다.

구국을 향해 타오른 기둥을 바라본다. 천형 같은 운명을 능히 받드는 기둥이 굳건하다. 어떤 어려움도 무찌를 강건한 몸피에서 호국의 숨이 맥박친다. 그 숨결을 이어온 이 땅의 기둥들을 경배한다. 시대의 질곡을 떠받쳐 온 기둥에 서린 의병의 혼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지피리라.

산마루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살이 내려앉는다. 고택이 거느린 풍경을 뒤로하고, 속세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들고나는 바람에 옥죄던 상념을 내려놓으니 한결 차분해진다. 곤비한 영혼을 다잡고 흐트러진 자리를 사릴 여유를 마음에 들인다. 삶의 힘받이가 되어줄 기둥을 눈으로 품는다.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닿지 못하는 날의 무게/황진숙  (0) 2026.05.31
마이너/황진숙  (0) 2026.04.08
채혈실 소묘/황진숙  (3) 2025.06.14
흘러가는 대로/황진숙  (2) 2025.06.14
멍석/황진숙  (1) 202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