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마이너/황진숙

에세이향기 2026. 4. 8. 10:36

 

 

 

마이너/황진숙

 

 

 

 

잊히는 것이 두려워 각을 잡는다. 접힌 부위마다 닿았던 살갗의 기억으로 버틴다. 차곡히 개켜져 숨을 죽이는 영혼들. 철이 바뀌어도 찾아주는 이 없다. 노를 잃은 반쪽 배처럼 허우룩하다. 어두컴컴한 장롱에 갇혀 허송세월하려니 낯빛이 누렇게 뜬다. 언제쯤 햇살 가득한 창문 옆 거울 앞에 설 수 있을까. 이제나저제나 바깥바람을 쐴 수 있으려나. 눈치 없이 먼지가 내려앉고 희망은 좀먹는다.

시간은 눈부신 것들을 쇠락시킨다. 뜨거운 열기가 식어가듯 생의 중심에 서는 것도 한때다. 쇼윈도의 마네킹에 그럴싸하게 입혀지고 옷걸이에 걸려 탄성을 자아내던 시절의 영광은 잠시다. 신상에 밀리고, 유행에 뒤떨어지고, 해지고 낡은 제각각의 사연은 옷더미로 뭉뚱그려져 뒷방으로 물러난다. 숫자 뒤에 여러 개의 0을 거느린 가격표를 달고 의기양양하던 자부심은 헌 옷으로 내몰려 저울에서 무게를 달아 값어치가 결정되는 굴욕으로 추락한다. 살아온 날의 부피마저 납작해져 압축팩에 처박힌다.

허나 세상의 뭇매를 맞을 적에 제일 먼저 나서는 존재들, 또한 이들이다. 땡볕 아래 쉰내 나는 땀방울을 받아내느라 누렇게 바래진 티셔츠, 답답한 세상사로 가슴팍을 쥐어뜯는 바람에 단추가 떨어져 나간 카디건, 달음박질치는 하루를 따라잡기 위해 걷고 달려 무릎 부위가 불거져 나온 바지, 휴식 없는 중노동으로 닳고 닳아 반드러워진 유니폼, 늘어나는 나잇살을 이기지 못해 솔기가 뜯어진 와이셔츠 등 누군가와 한 몸이 되어 동고동락한 시간의 흔적들로 후줄근해지기 일쑤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궤도를 따라 쓸리고 닳아 처음의 윤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꾸만 느슨해져,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예전의 탄성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맥없이 버려지긴 싫다. 옷 무더기로 쌓여 한숨을 일으키는 신세가 되느니 추위에 떠는 노숙자나 행려자의 궁기라도 덮어주고 싶다. 뜯어져서 덧대어 깁고 성형해서 유행의 날개를 달고 다시 날고도 싶다.

누군가의 어깨로 등으로 허리로 무릎으로 살아온 세월. 볼품은 없어졌지만 아직은 너끈하다며 재기를 꿈꾸는 이들이 술렁인다. 배냇저고리를 입어야 열리고 수의가 걸쳐져야 닫히는 생을 함께하는 궤적이 당당하기만 하다.

한때는 패션의 완성이라는 양말까지 허투루 신어본 적 없었다. 유행을 놓칠세라 계절별로 외출복을 사들였다. 신발에 모자까지 맞춤으로 입고 다녔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남편 덕에 살림살이에 윤기가 돌았다. 어느 날, 순항하던 남편의 회사가 경기 불황의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었다. 집안의 옷가지들은 축축이 젖어 그늘이 졌다. 일거리가 없어 현장에서 조기퇴직 당한 작업복의 조바심치는 소리, 종종걸음으로 의식주를 주관하던 앞치마의 한숨 소리, 떼를 쓰다가 잠이 든 교복의 잠꼬대 소리, 천방지축 멜빵바지의 울음소리가 적막한 집안을 울렸다. 균열이 간 시간으로 한데 엉킨 옷들이 갈 곳을 몰라 허둥댔다. 몸을 맞댄 옷가지들의 상처가 허물처럼 쌓였다.

하루아침에 해고의 풍랑에 휩쓸린 남편은 좌표를 잃고 표류했다. 어떻게든 정박할 곳을 찾아 줄을 댔지만, 물정에 어두워 번번이 손해를 봤다. 고액 연봉이라는 지인의 말에 현혹되어 다단계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의욕을 앞세운 동업은 배신의 해일에 떠밀려 난파되었다. 실의에 잠긴 남편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일상의 무게를 골방에 내팽개친 채 풀이 죽어갔다. 칩거 아닌 칩거로 통장의 잔액은 가파르게 하강 곡선을 그렸다. 급기야 믿거니 보증 선 호의가 독촉장으로 날아들자 빚더미에 압사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변방으로 밀려나는구나 싶었다. 망이라는 글자를 맞대고 서로를 견주는 희망과 절망처럼, 해가 뜨면 살아내야 한다는 오기로 옷깃을 세우고, 해가 지면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력으로 주저앉았다. 결국, 문패가 바뀌어 껍데기뿐인 집을 나와 슬레이트 지붕이 어깨를 겯고 있는 골목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대로 된 문패나 번지수도 없이 담벼락과 감나무가 표식을 대신하는 허름한 단칸방이 다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기름때든 흙먼지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루치의 식량과 한 달 치의 달세를 구하기 위해 남편은 처박아둔 작업복을 끄집어냈다. 옷더미 속에 방치된 작업복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둑한 구석의 습기를 타고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남편은 들러붙은 곰팡이를 털어낸 후 거무튀튀한 얼룩을 지워냈다. 햇살 아래서 바람을 쐬어 거풍시켰다. 새물내를 입힌 작업복은 축 처진 어깨선과 달랑거리는 단추, 터진 속주머니까지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었다. 지난날 숱하게 날밤을 지새우며 야근한 이력에 비비고 쓸려 낡았을 테다. 졸음을 쫓기 위해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설움을 성토하기 위해 알코올을 들이부으며, 반납한 청춘의 궤적이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난장판 같은 생애의 전장을 누빈 전우여서일까. 작업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편이 늘어진 어깨선을 바로 잡는다. 제자리를 이탈해 대롱거리는 단추를 실로 홀치고 세상사에 휩쓸려 바늘땀이 터진 주머니를 박음질로 메운다. 솔기가 느슨해져 실이 풀린 실밥을 매듭지어 갈무리한다. 수선하고 나니 추레했던 작업복이 한결 새뜻해졌다. 새 옷처럼 아무 흔적 없이 말끔할 순 없지만 아직은 제 몸 하나 내던져 밥벌이하기에 거뜬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으로 생채기 난 남편의 마음도 기워지는 듯 편안해진다. 서로의 상처가 아물어 견고해지는 것처럼 매만져진 작업복은 전장에 출정하는 남편의 몸에 밀착돼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것이다. 몰아치는 생의 매질을 견디며 남편의 가슴에 푸른 시간을 지필 것이다.

살아온 날의 무게와 부피를 되돌려 받는 인생 항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는 다시금 길을 나선다. 일상의 굴레를 돌며 서서히 낡아가는 세월. 아무도 마이너를 꿈꾸지 않지만 더러는 땀내에 절어 기름때를 묻히고, 더러는 때깔 잃은 얼룩진 기억으로, 더러는 한물갔다고 좌절에 휩싸인 채 돌고 돈다. 흐트러진 시간은 고정하고 찢어진 부위는 꿰맸기에 더 빛나는 마이너들. 어둠 속에 방치되고 폐기될까 두려워지는 밤을 보내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을 서사로 숨을 고른다.

몸을 껴입고 영혼을 껴입고 숱하게 새울 밤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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