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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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눈앞에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가 펼쳐져 있다. 레드와 오렌지가 뒤섞인 무제 無題다. 하루 종일 달궈진 해가 서서히 바닷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뜨거운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면 바다는 열기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알을 삼키기 직전, 바다는 혀가 엘까 잠시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바다는 오렌지가 뒤섞인 레드로, 레드가 뒤섞인 오렌지빛으로 타오른다. 불의 알이 아주 작은 공처럼 보일 때쯤이면 바다는 비로소 긴 혀를 내밀어 휘감는다. 적당히 말랑말랑한 불의 알을 삼킨 바다는 붉게 타오르고 밤이 깊도록 뜨거움을 기억한다. 검푸른 어둠이 끝없이 물결을 타고 밀려오고 밀려갈 때 바다는 잠들지 않고 소리로 존재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암흑 ..

좋은 수필 2024.10.24

우리들의 애도의 시간

우리들의 애도의 시간 애도하는 미술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죽음과 관련된 그림을 그려왔다. 삶과 죽음이 남매지간처럼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줬으며 죽어가는 것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그리고 이들을 화폭에 담아 대상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시간에 저항함으로써 죽어가는 것들을 애도하는 미술만의 방식인 것이다. 또한 영원회귀나 삶의 영속성에 대한 염원을 담아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고분벽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네덜란드의 정물화 모두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인식이 담긴 도상들이다.우리 선조들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선조들은 민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을 그렸고 일상 안에서 함께 했다. 그들의 삶 속엔 죽음에 대한 깊은 인..

평론 2024.10.21

봄 편지 / 박금아

봄 편지 / 박금아​"어느 날, 종가댁 맏며느리 같은 분이 다가와 삼 년 동안 일 천여 통의 편지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지인이 보내온 수필집의 서문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1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인연이 부러웠다. 문득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을 드나들던 손 편지 한 장이 생각났다.몇 번이나 미룬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매번 그쪽에서 날짜를 잡았고, 취소한 쪽은 나였다. 후일 연락하겠다고 해놓고도 하지 않았다. 손주를 돌보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그녀는 점심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당신..

좋은 수필 2024.10.20

도미의 장례/서*연

도미의 장례    도미의 몸통이 눈부시다. 접시 바닥의 무늬가 그대로 내비칠 만큼 도미는 얇게 회 처져 있다. 드문드문 젓가락질이 오가며 도미의 살점이 한 점 한 점 사라져 간다. 비릿한 물방울을 사방으로 튕기며 파닥이던 도미의 꼬리는 점차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렁그렁, 연한 소금기를 머금고 껌뻑이던 도미의 눈알이 출렁, 하고 터진다. 검은 먹물이 도미의 망막을 시커멓게 뒤덮는다.  도미의 부레는 이미 부패를 시작했다. 혹처럼 부풀어 오른 부레에는 비상 같은 청록색 반점이 돋는다. 그러나 도미는 끝까지 목숨을 놓지 않으려 한다. 다물어지는 아가미를 필사적으로 뻐끔거리며 도미는 숨을 몰아쉰다. 숨 가쁜 도미는 사해의 부력으로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만 같다. 아가미는 산소를 넣고 금방이라도 눈부시게 일어날 것..

좋은 수필 2024.10.20

포란/조현숙

포란 / 조현숙포란/조현숙 행복한 루치024. 10. 14. 13:35URL 복사​ ​ 병실의 밤은 누군가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을 파장하는 하늘에서 노을을 쓸어 담은 어둠이 물체와 공간을 한 보자기에 싸안는다. 복도를 구르는 불빛이 문틈 사이로 실뱀처럼 기어들어 온다. 빛을 따라 병상의 모서리들이 각을 풀고 보자기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낸다. 엄마는 등에 꽂힌 관 때문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불편한 채 잠들었다. 그래도 얕은 숨을 푸푸, 뱉어내는 걸 보면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노령의 얇은 몸피로 힘든 수술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모두의 난제였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깨는 기울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부터는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고,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새날은 밝아..

좋은 수필 2024.10.17

참기름 / 素人

참기름 / 素人  그저 나태함으로 따사로운 가을 볕 몸 감는 건 아니야 날선 검에 허리 잘리고도 꼿꼿한 정신 곧추세운 채 두름으로 묶인 목숨 찌는 한숨 忍苦하는 열정으로 젖은 육신 서서히 말리는 거다  빈들에 모여 선 우리들 모습에 까마귀도 울고 가지만 이대로 저물진 않아 너희들 모진 작대기에 멍들고 터져 나간 몸뚱아리 살과 뼈 문드러져도 더 세게 내리쳐라 세게 내리쳐라 훌훌 가짜들 쫓겨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았는데  너희들 거대한 조직고문실 같은 섬뜩한 열기 훅훅 볶아치고 전기구이 통닭 빙글빙글 뺑뺑이 돌려 우리들 일그러진 표정이어도 끝내 하나로 뭉쳤다 더러는 검게 그을린 육신 하나 둘 해체되고 타 버렸어도 밀려오는 거대한 무게 더 세게 내리눌러라 세게 내리눌러라  마지막 한 방울로 정제되는 우리들..

좋은 시 2024.10.16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샘바람이다. 바람 속에서 신천의 수양버들은 연둣빛의 길고 풍성한 가지들을 멋들어지게 흔들고 있다. 늘어선 버드나무들의 배경에 이제 곧 개나리가 만개하겠다. 바람은 꽃을 샘내지만 꽃은, 여린 꽃들은,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다이 피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제가 귀한 꽃임을,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환한 꽃임을 그 한살이로 보여준다.분출이란 여인이 있다. 일흔한 살이다. 위로 언니가 여섯이나 있었단다. 칠공주의 막내다. 그 여인이 이름의 내력을 얘기했을 때 정말이지 아연했다. 나는 요즘의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이름이 생긴 시대적 또는 심리적 배경을 알고도 남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부터 딸막..

좋은 수필 2024.10.13

명태 / 이규석

명태 / 이규석   모처럼 옛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둘러앉았다. 목로주점에서 잘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잔을 주고받는데, 자식 농사 망쳤다는 친구의 넋두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송창식이 부른 ‘명태’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 ’ 허구한 날 겨울 바다를 거슬러 올라야 하는 명태는 이름이 많아도 쓰임새마다 사람들의 입맛을 당긴다. 가까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태는 탕으로서 으뜸이요, 먼바다에서 잡아와 얼린 동태는 서민들의 추위를 녹여주는 찌개가 되거나 명절에는 흔쾌히 담백한 전이되기도 한다. 추운 들판에서 얼고 ..

좋은 수필 2024.10.12

[오늘 토박이말]구뜰하다

[오늘 토박이말]구뜰하다  #토박이말 #순우리말 #고유어 #숫우리말 #토박이말바라기 #구뜰하다 #하루하나 #맛 앞에 '엇'이 붙은 '엇구뜰하다'는 '조금 구뜰하다'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맛을 나타내는 말도 참 많습니다. 여기 모두 다 보이진 못하지만 맛을 나타내는 말을 아래에 모아 봤습니다. 말 그대로 맛만 보시고 여러분이 느끼는 맛은 몇 가지나 되는지 세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구수하다 : 맛이나 냄새 따위가 입맛이 당기도록 좋다.엇구수하다 : 맛이나 냄새가 조금 구수하다.담백하다 : 1 아무 맛이 없이 싱겁다. 2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맹맹하다 : 제 맛이 나지 아니하고 싱겁다.모름하다 : 생선이 신선한 맛이 적고 조금 타분하다.밍밍하다 : 제 맛이 나지 않고 몹시 싱겁다.바따라지다..

우리말 2024.10.10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여유를 가지고 가만가만 흘러가는 강이 아름답다. 강은 바람의 발자국으로 수없는 물결을 이룬다. 이른 새벽에는 안개를 피워 올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 어디쯤에 작은 섬들을 두어 풀들을 자라게 하고 새들이 와서 한가롭게 놀게도 한다. 늘 앞산의 그림자를 품어주고, 마주하는 하늘의 구름들까지 품어주며, 다가가는 것은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는다.집 앞에는 강이 있다. 그 강은 영남의 명산인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강가의 마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강변은 다듬어진 산책로가 있고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사계절 내내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좋은 수필 2024.10.08

선을 읽다/황진숙

선을 읽다/황진숙 선을 읽는다. 선이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감각이 돌올하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발에서부터 하루의 끝을 몰고 오는 어둑발까지, 아니 홀로 깨어 있는 새벽녘까지 선은 그네들에게 깃든 기운을 드러내며 풍경을 이룬다. 말이 없는 사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며 의미를 발화한다.오랜만에 지인을 방문했다. 주인장이 반갑다며 차를 내온다.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케모마일 차를 권한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데 찻잔이 예사롭지 않다. 입술을 맞대는 부분부터 바닥까지 금이 그어져 있다. 그로부터 파생된 몇 줄기의 선들이 넝쿨처럼 뻗어나갔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같기도 한 선들은 금분으로 치장되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인장이 설거지하다가 놓쳤다며 깨진 부위를 접합했다고 말해준다. 애장하는 잔이라 차마 버릴 수 없..

발표작 2024.10.05

밥 / 허창옥

밥 / 허창옥  압력밥솥 밸브가 돌아간다. 똑똑해 빠진 밥솥이 말을 한다. “증기가 빠져나오니 주의하세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한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으니 밥을 저어주세요.” 그래요, 잘 저어서 먹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고맙다. 삶의 무거운 등짐도, 온갖 근심도 궁극적으로는 밥을 향해 있다. 밥 덕분에 살고 밥 때문에 싸우고 밥을 못 먹어서 죽는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죽음에 직면한 혈육과 친지들을 보아왔다. 대개는 질병 때문이다. 질병이 몸을 침범하고 악전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곡기를 끊었다.” 란 말을 이따금 들었다. 곡기를 끊는 것, 그건 마지막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러니까 복된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게 어떤 상황이..

좋은 수필 2024.10.03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색깔 고운 시간이다. 홍매화,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마음처럼 애매한 날씨의 이른 삼월에 잎보다 먼저 깨어난 꽃. 뭇 봄꽃들이 다투어 피기 전에 서둘러 봄을 점령하고 이내 물러나는 꽃. 섬진강 둔치의 홍매화가 봄 표지판인 양 반가운 여자는 꽃 보러 길을 나섰다. 아직도 봄꿈을 꾸시는가.   지금, 여기, 봄. 세상사에 끌려다닌 사람들에게 꽃은 못다 피운 꿈이든 조물주의 위로이든 딴 세상을 펼친다. 강을 끼고 접어든 광양 매화마을은 부신 꽃 누리다. 잔잔한 들녘과 언덕을 휘도는 흰 빛도 황홀한 하루 치의 무릉도원, 말간 언어들 사이로 막 봄을 열고 나온 홍매화가 난연한 문장을 긋는다. 내 생에도 저런 빛깔 남아있을지, 척박한 터전에 봄 하나 접붙여 볼 마음으로 견주고 따지..

좋은 수필 2024.10.03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호젓한 시골 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백두대간 숲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 가게 해야겠다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 숲의 정거장엔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단청 고운 절집 탱화 아래 앉아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몸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

좋은 시 2024.09.27

의자/박철

어느 강연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말간 얼굴로 무자비한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다. 꼭 있다. 뒷걸음질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듯 말을 찾았다. 변변찮은 대답을 동전 몇 푼처럼 꺼내놓은 순간을 지나고 생각하노니, 그때 이 시를 알았더라면! 나는 무구한 얼굴로 커다란 질문을 한 독자에게 답변 대신 이 시를 낭독해줬을 게다.이 아름다운 시는 1연에서 이미 끝났다. 높고도 깊은 ‘참말’이 순하게 놓여 있다. 시의 시원이 궁금한 자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순간이다. 갈참나무 의자 허리에 누군가 “연선아 좋아해” 하고 새기는 일과 시인이 원고지에 시를 써내려가는 일의 본질이 같다는 것! 그러니까 마음 깊이 치밀어 올라 꺼내놓은 말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겨두는..

좋은 시 2024.09.27

길/조용미

누군들 없을까. 인생의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람. 칸칸의 마디를 넘겨도 페이지 속에 묻히지 않는, 인생이라는 책을 펼칠 때마다 자동으로 펼쳐지는 사람. 충분히 용서했어도 되살아나는 사람. 누군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없을까.무자비하게 찾아오는 그 아찔함은 생의 허기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흘려보냈던 것을 애써 들춰내어 스산함을 자처한다. 왜 인간은 ‘돌아보는 맛’을 놓지 못하는가.조용미 시인은 인생의 여정에서 그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리 용서를 서로 수박 나누듯 나눠 가졌다 해도 그것은 해결 나지 않는 일임을, 그것은 이 세계에서 덮이지 않는 사건임을 사무치게 선언한다.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인연이라니. 이 어찌할 수 없는 ..

좋은 시 2024.09.27

손을 사랑하는 일/피재현

손을 보는데 마음이 미어지는 사람, 있다. 다른 것도 아닌데 손만으로 그 사람의 많은 걸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 어쩌면 손에 보이는 것은 얼굴 표정일 수도 있으며 사연일 수도 있으며 마음일 수도 있는 것. 손은 당신하고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을 터인데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만큼의 애정 때문이런가. 그때 덥석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충동만으로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것은 주책일런가.시인은 자신의 갈라진 손을 돌보다가 손이 했던 일들을 들춰내는데 참 절묘한 것은, 그의 손 역사와 내 손의 역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손인데 뭐 어때서 그리 잡질 못했나. 손만 잡으면 좀 괜찮아질 텐데 우린 뭐 하느라 손을 내려놓고만 있었나.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아주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는 늦은..

좋은 시 2024.09.27

면벽/박용래

여름의 촉감, 여름의 냄새, 여름의 소리, 여름의 색깔이 짧은 시 한편에 고루 담겨 있다. 때는 여름의 한복판, “바람 한 점 없는 밤”이다. 고양이는 덜 더운 누다락으로 피신하고, 화자는 모기향 앞에서 벽을 마주하고 수련 중이다. 눈 감고 5분이란 오묘한 시간이 흐르고, 화자는 다른 시공간으로 건너간다. 감은 눈 속에서 펼쳐진 세계는 가을, 한밤이다. 누가 죽었을까. 꽃상여가 벼이삭을 스치며 내는 소리, 망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어허 어하……” 다시 눈 뜨면 코끝엔 모기향 냄새, 여름은 가을밤처럼 돌연 깊어져 있으리라.눈 감으면 떠오른다. 어릴 적 모기향에서 연기가 올라갈 때 나던 냄새,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만들어내고 나를 향해 부채질을 해주던 할머니의 손이 느려지다 멈추면 여름이..

좋은 시 2024.09.27

불면/최지은

나는 쉽게 잠드는 편이다.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걱정이나 불안이 있을 때는 다르다. 작은 망치로 하룻밤을 조각내듯, 여러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럴 땐 하룻밤이 아니라 여드레 밤을 겪은 느낌이다. 몸은 자고 싶은데, 마음이 자꾸 헤매는 기분이 들 때 이 시를 만났다.시인은 단 두 줄로 아름다운 불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군더더기 없이 환하다. 머릿속에서 누가 작은 횃불을 들고 서성이는 것 같다. 발은 차갑고 머리는 뜨거워 몸의 순환 회로가 고장 난 것 같을 때, 잠이 자꾸만 달아날 때 눈 감으면 보인다.“오래 가꾸지 않은 정원을/ 홀로 거니는 아이”의 혼곤한 서성임! 가꾸지 않은 정원은 어떨 것인가?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정원은 자연보다 황량해진다. 꽃이었던 꽃, 나무였던 ..

좋은 시 2024.09.27

장마/김사인

비 오신다. 긴 긴 장마다. 어릴 땐 장마가 싫었다. 더운 것만으로도 고단한데 축축해지기까지 해야 하다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일까?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장마 지면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어느 산장 같은 곳에 숨어, 한 사나흘 틀어박혀 있고 싶다. 벽난로 앞에 젖은 양말을 널어두고, 질릴 때까지 빗소리를 듣다 졸고 싶다. 꿈같은 일일까?눅눅한 빨래를 개다 ‘장마’의 첫 구절을 돌림노래 외듯 흥얼거린다.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듣는 이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내리는 비에 대고 흥얼거릴 뿐이다. 그런데 공작산 수타사는 어디쯤에 있는 절일까? 그곳의 물미나리·패랭이꽃은 얼마나 싱싱할까? 시 속 화자를 따라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

좋은 시 202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