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6

돌꽃/김은주

돌꽃                                                                                                                                                                           김은주 저녁 찬거리를 구하러 길을 나선다. 길을 가다 보면 늘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내 발길이 묶인다. 붉은 신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내 발치에 와 끄떡이는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는 움직일 때마다 길어졌다 또 짧아지곤 한다. 지는 해에 그림자는 더 길어지고 내 발등을 덮었다가는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파란 불이 켜졌다. 흑백 건반 같은 횡단보도를 탕탕 튕기며 생기발랄한 미니..

좋은 수필 2024.07.29

‘도’와 ‘또’ 사이/박영란

‘도’와 ‘또’ 사이/박영란    “요즘도 글 쓰세요.”  “아직도 글 써?”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글 쓰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 곧 그만둘 일처럼 보였을까. 그냥 가볍게 물어오는 그 인사말 속에 들어있던 ‘도’의 어감은 늘 강조사처럼 들렸다. 마치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니?’ 하는 확인처럼.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 듯한, 현재진행형인 나의 글쓰기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있었는지 모른다. 두 권의 책을 내었을 쯤에야 근황에서 ‘도’ 는 사라졌다.   요즘은 도의 환생처럼 ‘ㄷ’하나가 더 붙어 ‘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거듭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이 부사가, 로또에 당첨되고 또 당첨된 그런 기염처럼 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네 번째가 되는 책 「책..

좋은 수필 2024.07.29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날씨는 싱싱하다 못해 퍼덕퍼덕 살아있다. 그래서 여름은 밝다. 오만한 하늘이 세상을 굽어보는 날, 열무김치를 담는다. 냉장고 속, 여러 개의 김치통에서 제각기 다른 맛의 열무김치가 익어가고 있는데 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청이 생생한 열무를 산다. 씹으면 아삭아삭 상큼한 맛을 낼 것 같은 연한 줄기와 그 줄기에 매달린 파릇한 초록의 잎사귀가 생명의 소리로 나를 부른다. 가지런히 묶여서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열무를 보면 생각 없이 두 단을 사고 만다. 열무를 풀어헤치자 식구들이 한심한 듯 쳐다본다. 여름내 밥상 위에 올린 반찬은 거의 열무김치였다. 끼니때마다 열무 비빔밥이나 열무 국수, 심지어는 샌드위치에도 열무김치를 듬뿍 넣어주었다...

좋은 수필 2024.07.28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봄은 산골짜기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잠시 들르거나 멈추어 선 길손이어도 안 된다.새벽 미명부터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움이 짙게 깔릴 때까지, 마루와 마당으로 시시각각 다른 모양 되어 들르는 봄의 미세한 모습들을 눈치챌 수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면 딱 좋겠다. 고샅으로 내달린다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종착지가 되고, 이마에 손 얹어 먼 눈 뜬다 해도 앞산 뒷산 자락에서 멈추는 그런 산골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자그마한 남향 집, 낮은 울타리 두른 작은 마당에 서 있으면 가만가만 몸 뒤척이기 시작하는 봄의 첫 기척을 듣는다. 나무들을 깨우는 거센 바람은 당당하게 입성하는 봄의 첫 발자욱 소리다. 간단없이 불어대는 그 바람은 냉기와 침묵만으로 일관하던 골짜기가 드디어 기적..

좋은 수필 2024.07.28

곰배 / 정서윤

곰배 / 정서윤    아무리 예쁘게 보려고 해도 볼품이 없다. 뭉텅한 나무토막에 긴 자루 하나를 쿡 박아 놓은 저 물건! 슬쩍 봐도 못생겼고 자세히 보면 더욱 못난이다. 사람이든 연장이든 인물 보고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못난 건 못난 것이다.나의 어릴 적 별명은 곰배였다. 별명이 곰배인데 사람들은 이름인 양 곰배라 불렀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이 풍진 세상으로 나올 때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기에 곰배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내 기억에 없는 증조할머니께서 저 물건의 이름을 내게 별명으로 붙어주고 세상을 뜨셨으니,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 답답할 노릇이다.초등학교에 가서도 이름은 출석부에만 올려놓고 곰배를 명찰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건 순전히 윗마을에 살던 반장 글마 때문이었다. 글마는 서윤이라는 고운 내 ..

좋은 수필 2024.07.27

등신불 / 신성애

등신불 / 신성애바위산을 올랐다.가끔씩 바람이 불어 왔으나 땀으로 몸을 젖게 하는 초여름이었다. 바위투성이 사이로 메말라 비틀어져 분재가 되어 있는 나무의 모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비바람에 홀로 부대끼며 살아온 나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득한 몸짓이었다. 여느 산등성이에 의연하게 하늘을 이고 선 푸른 소나무가 아니었다. 쭉 뻗어 가지 못하고 웅크린 옹이진 나무는 안으로만 아픔을 삭혀온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 같았다. 새의 깃털에 안겨 가다 제 무게에 힘겨워 바위틈에 떨어져 내린 씨앗이리라. 서산으로 넘어가는 자투리 햇살을 받아 제 한 몸 움직이기도 힘든 곳에 싹을 틔웠으리라. 몸은 바위틈새에서 옴짝달싹 못했지만 마음은 구름 따라 흘러가다 이슬로 내리다가 소낙비가 되어 땅속..

좋은 수필 2024.07.27

비녀 / 배혜경

비녀 / 배혜경   빗장이 살포시 풀리며 한옥 문이 열리고 있다. 거칠어 보이는 나뭇결이 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성숙한 여인의 머릿결처럼 그늘 짙은 나뭇결에 눈을 바투 대었다. 결을 따라 세로로 또박또박 새겨진 ‘진순분’이라는 글자가 들어온다. 이 집에 살았던 처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어느 임이 오셨기에 기다랗게 질러져 있었을 빗장이 살그머니 열리고 있는 걸까. 흑백 사진 속, 오래된 나무대문이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로 기억의 빗장을 열어 준다.외할머니는 햇살 좋은 날이면 마루 끝에 앉아 계시곤 했다. 방금 세수한 것 같은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태는 백자 화병 같았다. 수줍음을 타고 목소리 한 번 크게 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어디에 계시든 쉽게 눈에 띄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할머니가..

좋은 수필 2024.07.27

우거지 사랑 / 송미심

우거지 사랑 / 송미심       한창 붉은 꽃무릇이 지천이다. 그 꽃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댄다. 몸매 고운 아가씨도 아니고 우아한 옷맵시로 멋진 자세를 취하는 유명 모델은 더더욱 아니다. 카메라를 쳐다보며 스스로 어수룩한 모습에 쑥스러운 중년 여인은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에 흠칫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물보다 낫게 찍힐 것을 바라고 있다. 휴일이라 쉬고 싶을 텐데 남자는 행사장에 함께 가겠다고 사진기부터 챙긴다. 여자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웬일로 새벽부터 서둘러댔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승용차로 두어 시간을 달려야 하는 꽤 먼 거리였다. 여자를 목적지에 내려놓고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주변을 미리 살펴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찾아두려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4.07.26

즉경 / 배혜경

즉경 / 배혜경                                                                                                                                                                                                                                         붉은 등대 하나 솟는다. 뜨겁고도 서늘한 시간이다. 시간을 분절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살고 싶다. 붙잡아 두고 싶은 시간 위로 속도를 낮추어 미끄러진다. 무작정 안겨드는 길을 맞바람 삼아 달리고 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더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야 도시..

좋은 수필 2024.07.26

못난이 백서 / 노정숙

못난이 백서 / 노정숙  싹둑, 머리를 커트했다. 내 20대 스타일이다. 그 푸르던 시절에도 긴 머리 찰랑이며 여성미를 뽐내보지 못했다. 선머슴처럼 짧아진 머리를 보며 남편은 그게 뭐냐고 난리다. 얼굴이 함지박만 해 보인다나. 요즘 얼굴 작게 보이는 게 대세인데, 못생긴 얼굴을 다 드러냈다고 핀잔이다. 이 남자에게 립서비스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자기는 정직하다며 매운 말만 한다. 내 참, 못생긴 것 다 아는데도 호시탐탐 기회를 잡아서 상기시킨다. 집에서 헤어밴드로 머리를 올려붙일 때마다 그런 스타일은 잘 생긴 사람이 하는 거라나. 이렇게 말본새 없는 사람과 삼십 년을 넘게 살다보니 나도 많이 여물어졌다. 웬만한 말폭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사실은 못생겼다는 데 대해서 면역이 있다. 어릴 때 오빠들한테 ..

좋은 수필 2024.07.26

바가지 / 강여울

바가지 / 강여울  눈비가 번갈아 다녀간 뒤라선지 주유소 세차장에 차들이 줄을 섰다. 기름을 넣고 차례를 기다리며 자동세차터널로 들어가는 차를 바라본다. 얼룩 먼지를 뒤집어 쓴 차들이 터널을 통과하면 말갛게 세수를 한 아이처럼 나온다. 내 앞 차의 뒤를 이어 세차터널 입구로 들어선다. 세차터널은 차가 시동을 끄고 수동적 자세를 취해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상생활에서 씻기는 모든 것들은 ‘나 죽었소’ 하고 몸을 맡기는 법이다.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하며 차가 씻기는 동안, 나는 비오는 골방에 앉은 듯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정신없이 달려온 내 삶이 빠른 영상으로 지나간다. 세차기는 바람으로 물기를 쓸어내리고 목욕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듯 나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들어 갈 때와는 달리 깨끗해진 차 유..

좋은 수필 2024.07.26

홀로서기 / 장수영

홀로서기 / 장수영아침 안개가 들녘위에 이불처럼 누워있다. 안개 속에 잠긴 절집을 기대하며 팔공산 자락에 구름처럼 머무는 거조암을 찾았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가지런한 담장너머로 반쯤 가려진 영산전이 단아하게 앉아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영산루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한 발 돌계단에 올라서려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구름 한 점이 내려앉은 돌확에 감로수가 찰랑거린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속세에서 찌든 영혼을 말끔히 씻어내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석탑 뒤로 영산전이 민얼굴을 드러낸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따뜻한 남편의 품 같이 느껴진다.영산루를 거쳐 계단을 오르면 석탑이 영산전 앞에 단아하게 서 있다. 석탑에는 불자들이 한 장 한 장 매듭을 지어놓은 소원 띠를..

좋은 수필 2024.07.25

구두 / 정경자

구두 / 정경자벗어놓은 구두에도 표정이 있다. 작고 하찮게 생각하는 신발에도 주인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이다.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첫 대면일수록 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첫인상이라면 흔히들 얼굴이나 옷차람일 떠올린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의도된 것이라면 땅바닥에 붙어 옷에 가려진 채, 무심해질 수 있는 차림새는 신발인 셈이다. 그것으로 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개성, 성품까지도 미루어 짐작 해본다.남편의 구두 때문에 우리 집에는 며칠째 한랭전선이다. 싸움의 발단은 남편이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데서 비롯되었다. 올바르게 착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벗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딱 남편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닮았다. 모질지 않는 유순한 심성 때문에 오늘날 한 이불을 덮는 식구가 되었지만 남..

좋은 수필 2024.07.25

손 / 남영숙

손 / 남영숙금방 세수한 얼굴은 그대로 식물성이다. 일체의 상념을 씻어낸 표정이다. 톡톡 화장품을 바르는 목과 얼굴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수고한 손에겐 화장품이 아껴진다. 보습제 하나면 그만이다. 문득 노고에 비해 소홀히 대접받는 손에 대한 생각을 한다.사람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연결고리의 시작이 되는 신체의 부분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손이 있어 가능해진다. 인간의 인프라인 것이다. 생활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보병처럼 묵묵하다. 음식을 해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글씨를 쓰며 반가운 이의 손을 덥석 잡고, 온갖 궂은일과 즐거운 일에 첨병으로 나선다.그렇게 세상과의 만남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엮어주는 최초의 동작도 손에서 시작된다. 처음으로 이성과 손을 잡던 따스하고 말랑..

좋은 수필 2024.07.25

누드모델 / 서은영

누드모델 / 서은영여자의 몸은 곡선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안에 뼈마디 관절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둥근 아기집을 품고 지아비를 품고 세상마저도 품어내는 여자는 태생부터 곡선이어야 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탄생의 공간을 품으며 동그랗게 무엇이든 갈무리하고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여자의 몸, 가히 곡선의 겹침이다.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여중생 때였다. 미술 시간은 시험기간이나 되어서야 다른 과목들처럼 책을 펼치고 약간의 이론 수업을 했다. 총각 미술 선생님이 ‘누드화란 말이지….’라고 설명하자 나른하던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졌다. 나비 한 쌍만 어울려 날고 있어도 공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던 우리는 덜 익은 풋사과처럼 ‘푸풋..

좋은 수필 2024.07.25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푸른 물감을 맘껏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 해변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호텔에서부터 십여 분쯤 걸어 나왔다. 멀리 타우루스산맥이 건너다보이고 바람은 그곳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어온다. 망연히 서서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을 바라본다. 그동안 내가 맞이하고 싶었던 여름과의 거리는 눈 덮인 산과 안탈리아 해변의 사이만큼이나 멀었으리라.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바다는 주름진 얼굴로 끊임없이 내게로 향해 달려온다.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나는 몇 년을 망설였던가. 오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히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첫 방문은 10년 전, 겨울이었다. 그땐 성난 파도 위로 거대한 줄기를 뻗은 눈 덮인 타우루스산맥만 눈에 들어왔었다. 그 겨울에 글과 사진으로..

좋은 수필 2024.07.25

등대바라기 / 변재영

등대바라기 / 변재영 등대는 기다림이다. “철썩철썩 쏴아아~” 발밑에 초록빛 바다가 출렁인다. 내 유년의 아픔이 섬처럼 동동 떠있는 고향 바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짭조름한 갯내가 후각을 파고든다. 쪽빛 바다에 갈맷빛 하늘, 기다림의 상징인 빨간 등대, 맴돌이치는 갈매기들의 군무, 갯바위를 훑는 파도의 몸짓까지 아버지의 짧은 생이 웅크린 낯익은 바다가 아니던가. 보물섬 남해 끝자락, 일명 몰갯넘이 내 고향이다. 모래톱에 일군 동네라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면청을 비롯하여 현대식 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다. 물매진 언덕을 오른다. 밤새 혼신의 힘으로 타올랐던 등대가 쉬고 있다. 철망 같은 섬에 갇혀 뭍을 향해 훨훨 날고 싶었던 까까머리 소년을 기억할까. 문득..

좋은 수필 2024.07.24

등대의 종교/허은규

등대의 종교/허은규 숱한 서사가 채워지듯 수면의 배들이 직선과 나선을 그린다. 바다로 나서는 걸음마다 나직한 독송이었다. 등대의 속살은 사시사철 치성하는 느티나무의 줄기이다. 높이 솟은 그 모양은 우미한 촛대이거나 돌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도색한 이국의 기념품이다. 높은 등탑은 가뭇한 바다 수면을 명랑하게 일깨우는 청동의 종탑을 떠올리게 한다. 남해 바다로 낚시를 갈 때마다 등대는 비린내를 휘감고 어촌의 사절인듯 감읍하며 반겨준다. 방수의 페인트로 겹칠 된 탑실을 들여다보면 바깥의 사정과 무관한 침묵과 평온이 곤곤하게 공동을 채운다.단단한 육지를 밟고 선 여행자의 깜냥에 등대는 볼거리를 풍요롭게 북돋는 조형물이거나 내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보이기 쉽다. 바다 등롱이 내뿜는 절실함이 도보하는 행인의 심중으로..

좋은 수필 2024.07.24

하얀 소묘/서숙

하얀 소묘/서숙하얀색은 가장 많이 드러내며 동시에 가장 넓게 가려주는 바탕색이다. 꿈과 환상의 길목을 열기도 슬픔과 체념으 조용히 가누기도 하는 색,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고 세심하면서도 대범하고 흔하면서도 귀한, 색 아닌 색, 아니 색중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철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내 마음속의 흰색이 아롱아롱 눈부시다.    내 안의 흰빛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면 바지랑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너울거리던 흰 무명천이 눈앞을 가득 막아선다. 온 폭을 이은 이불잇은 빨랫줄을 다 차지하고 정오의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났다. ​길게 누워 어른대는 그림자를 거느리고 옥양목의 홑청이 꾸득꾸득 마르면 나는 그 천을 동그르르 작은 몸에 감았다 폈다하며 들락거렸다. 그럴 때 하얀 천은 범선의 흰 돛이 되..

좋은 수필 2024.07.23

질그릇 / 배종팔

질그릇 / 배종팔     옛것이라 손을 타면 쉬이 깨질까 싶어 찬장 깊숙이 묵혀 둔 것이 잘못이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설거지가 귀찮아 찬장의 그릇을 죄다 꺼내 썼다. 티끌만한 생채기도 큰 흠집이 되는 데 그릇만한 게 있을까.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마냥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찬장 한켠에 갇혀 딸아이에게 대물림될 뻔한 그릇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한 식구가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이 손 한 뼘 정도의 아가리에 굽이 짧고 허리가 배흘림인, 국수집에나 있음직한 그 질그릇은 이제 다른 그릇과 나란히 찬장에 자리 잡고 있다.거죽이 거무튀튀하고 모양마저 볼품없는, 골동품으로도 실생활 용기로도 쓰기에 어중간한 저 막사발을 아내의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또 아내에게 어떤 의미로 물려주..

좋은 수필 2024.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