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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밤 꽃/박제영

에세이향기 2023. 7. 1. 12:03

 

밤 꽃/박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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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산에 오르다보면 비린내 같기도 한데 뭐라 말하기 참 거시기한, 참 묘한(?) 향기가 코를 찡긋거리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겠네요. 온 산을 진동하는 정액 냄새로 정정하지요. 중학생 때, 처음 몽정을 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엄마 몰래 빤쓰(?)를 빨면서 처음 맡아보았던 그 정액 냄새. 산을 오르는데 난데없는 정액 냄새라니! 그 냄새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민망하기도 할 듯한데요. 그 망측한 냄새를 풍기는 범인은 바로 밤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조금은 야한 꽃, 동서고금 시인 묵객들이 야화(夜花)라고 부르곤 했던, 그러나 실은 밤나무꽃인,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밤나무와 밤 그리고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헌관의 「우리 생활 속의 나무」(국립산림과학원, 2007)에 보면 밤나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종자에서 싹이 나올 때 종자 껍질을 밀고 올라오는데, 밤나무는 이상하게도 뿌리와 줄기의 중간 부분에 오랫동안 껍질을 그대로 매달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낳은 근본, 즉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해서 제상에도 꼭 밤을 올리고, 사당이나 묘소의 위패를 만들 때도 밤나무 목재를 쓰는 것이다. 또한, 밤은 옛날부터 다산과 부귀를 상징해 혼례 때는 없어서는 안 되며, 지금도 자식 많이 낳으라고 폐백 때 대추와 함께 신부에게 던져주는 풍습이 남아 있다. 밤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과 같은 많은 영양소와 무기물이 들어 있으며,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해주고 콩팥을 보호하며 혈액순환을 돕고 지혈작용을 해준다. 「동의보감」에 보면 설사할 때는 군밤을 먹고, 하혈할 때는 밤껍질을 태워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던 날 폐백을 드릴 때 어머니께서 아내의 치마폭에 밤을 던져주며 “훌륭한 자식 낳고 부자 돼라” 하셨던 말씀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밤이 다산과 부귀를 상징한다는 것을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예로부터 자기를 낳은 근본,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라 해서 제사상에 밤을 올리는 것이라는 것, 사당이나 묘소의 위패를 만들 때 밤나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고요.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밤을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는 자식의 출세를 기원하는 뜻이랍니다. 밤이 대개 한 껍질 안에 3개의 열매가 들어 있어 이것이 소위 삼정승 - 좌의정, 영의정, 우의정 - 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자식이 커서 삼정승에 오르길 기원하는 부모의 심정을 담아 제사상에 밤을 올렸다는 얘기인데, 우리가 흔히 행하고 있는 풍습을 세심히 살펴서 그 이유를 밝히면 조상들의 사물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시 정액 냄새를 풍기는, 산을 하얗게 수놓은 밤꽃 얘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랗고 하얀 말미잘 촉수처럼 생긴 밤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밤나무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미잘 촉수처럼 생긴 기다랗고 하얀 수많은 수꽃들 사이 아래쪽에 작은 씨방이 붙어 있는 가느다란 암꽃이 하나씩 숨어 있는 게 보이지요. 암꽃은 수꽃들이 피고 나서 4~5일 늦게 핀다고 합니다.
밤나무의 수분(꽃가루받이)은 곤충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바람을 이용하는데, 꽃가루는 최고 150m까지 날아간다고 하네요. (사정거리가 150m라니 참 대단하지요.) 물론 수분에 성공하려면 그보다는 훨씬 짧은 거리에 있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성공적으로 수분이 이루어지면 수꽃은 할 일 다 했으니 우수수 땅 아래로 떨어지는 것인데, 이 떨어진 밤꽃(수꽃)들을 수집해서 양동이에 한 움큼 넣어 끓인 물에 발을 담그면 무좀이 낫는다는 민간요법도 전해지지요.
이쯤 해서 밤꽃에 관한 두 편의 시 - 남자의 시선으로 쓴 시와 여자의 시선으로 쓴 시 – 를 읽어보겠습니다. 복효근의 시 「밤꽃이 필 무렵」과 최광임의 시 「밤꽃, 둥근 슬픔을 매달다」입니다.

바위투성이 소나무 산이 신랑산이지
찔레 넝쿨 부케를 든
저 다소곳 산은 신부산이겠지
해가 설핏 기우는 둠벙엔
구름이 주례를 서고 수만 개구리의 축가,
우 우- 한바탕 혼례마당이여
이런 날은
가난한 신접살림을 차리기도 좋은 날
흠 흠 흐- 음
해가 다 기울기도 전에 벌써 밤꽃 내음새
다디단 숨결 내음새
산도 산도 흘레마당이여
저녁 하늘엔 별 숭숭 문구멍이 뚫리고
저세상까지 넘나드는 살 내음새
아- 다행히 나 아무도 그립지 않은 날
― 복효근, 「밤꽃이 필 무렵」 전문

이맘때 나는 암컷이었다
둥그런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다,
고약한 냄새에 허둥거리며
밥 수저 놓을 자리에 헛구역질 한 그릇 놓는다
수컷의 본능만으로
암컷들의 꽁무니를 쫓아 달려오던 짐승
그런 밤, 동산 넘어 도시의 네온싸인들
붉은 입들은 지칠 줄 모르고 오물거렸다
누가 누구를 먹은 것인지 새벽녘
핏기 가신 이빨로 드러눕는 세상
바람은 자꾸 코를 틀어막곤 했다
상처 탓이었다
내 안에서 영글지 못하고 실족해버린 풋밤들의
누렇게 들뜬 머리칼로 자라 칭칭 동여매던 허기
나 자신조차 가시가 되어 살았다, 지금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짐승처럼 한 시절 견뎌 온몸을 세우는 냄새다
나는 암컷이 아니라 꽃이었다
둥근 식탁에 행주질을 하다가
꽃 지는 밤에서야 안다, 나는 종내
밤栗일 것이었다
― 최광임, 「밤꽃, 둥근 슬픔을 매달다」 전문

이 산 저 산 하얗게 뒤덮은 밤꽃을 보면서 복효근 시인은 산과 산이 벌이는 “한바탕 혼례마당”이라 하고 “산도 산도 흘레마당”이라 하지요. 그게 다 순전히 밤꽃 냄새 때문일 텐데요. 그 비릿한 정액 냄새 때문일 텐데요. 이를 두고 산과 산이 한바탕 정사(情事)를 벌이는 것이라 하니, “하늘엔 별 숭숭 문구멍이 뚫리고 / 저세상까지 넘나드는 살 내음새”라니 산과 산이 차린 신방(新房)의 규모가 어마무시하지요.
이에 반해 최광임 시인은 어떤가요. 밤꽃이 풍기는 그 “고약한 냄새”와 “역한 냄새”에서 시상을 떠올린 것이겠지만, 정작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컷, 암컷’, ‘수꽃, 암꽃’이 아니라 종내 ‘밤栗’이라는 열매 혹은 ‘밤’이라는 그 자체이지요. 수컷, 암컷, 정액 냄새 이런 것들은 오직 밤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지요. 당신은 이 두 편의 시를 어떻게 읽을까요?
밤꽃에서 정액 냄새를 풍긴다고 했는데, 정액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암꽃이 아니라 수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꽃에서 정액 냄새가 나는 것일까요?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정말로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답을 얘기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밤꽃과 정액에는 공통적으로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 정액 속의 스퍼미딘과 스퍼민은 정자가 산성이 강한 여성의 질을 통과해 난자에 도달할 때까지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밤꽃에 있는 스퍼미딘과 스퍼민도 번식을 돕는다. 밤꽃과 정액의 냄새는 바로 이 스퍼미딘과 스퍼민이 내는 냄새이다.”

그러니까 냄새의 주범은 바로 ‘스퍼미딘’과 ‘스퍼민’이라는 물질이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마직막으로 밤꽃을 어머니의 시선과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시 두 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나영의 시 「유월」과 최혜숙의 시 「밤꽃」입니다.

툭하면 문 걸어 잠근다 싶었더니
더러 수습하지 못한 밤꽃들
바닥에 자해공갈단처럼 납작 엎드리고 있다
계절은 이렇게 온다 재촉하지 않아도
내 눈엔 아직 고사리순 같은 녀석이
몰래 숨어서 피워올리고 솎아낸
평생 생산해낼 저 밤꽃들,
불발이라도 좋다,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뿌리부터 박고 보는
저 수컷의 근성
― 김나영, 「유월」 부분

아버지 얼굴에 술꽃이 피면 쥐코밥상은 마당을 날아다닌다

마당 가운데 처박힌 밥상은 모로 서서 울고
젊은 엄마는 모로 앉아서 운다

땅바닥에 쏟아진 하얀 쌀밥을 주워 담으며
흰 달빛처럼 엄마가 운다

밤꽃이 웬수야
밤나무를 없애버려야지

엄마는 도끼를 들고 몇 번이나 밤나무 밑동을 찍었지만
늙은 밤나무엔 해마다 왕밤이 열렸다

밤꽃 사이로 둥글게 떠 있는 쌀밥 한 덩이
괜스레 헛배만 불렀다
― 최혜숙, 「밤꽃」 전문

“뿌리부터 박고 보는” “수컷의 근성”을 지닌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가 될 테지요. 수컷의 근성을 지닌 “아버지 얼굴에 술꽃이” 필 때마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울었던가요. 수컷의 근성이 얼마나 많은 엄마들을 울렸던가요. 그렇다 해도 밤꽃은 죄가 없겠지요. 밤꽃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