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552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뉴턴의 사과처럼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심장이하늘에서 땅까지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좋은 시 02:43:39

나이테/최재영

나이테/최재영잘려진 나무를 읽는다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선명한 경계사이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나이테는 나무의 생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잘려진 단면을 보면 나무의 성장과정이 보이고 잘려진 나무에서도 새 ..

좋은 시 2024.05.03

부지깽이/조경숙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닭들을 내쫓기도 하고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몽당연필처럼 닳아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토사구팽兎死拘烹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좋은 시 2024.05.03

억새/박은양

억새​​​박은영​​​​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억세게 운이 좋은 날은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의 흔들림은 비루해서 체머리를 앓는 독거노인의 고독을 닮았다​인생은 혼자인 것이니, 라며 애써 자위를 할수록 모든 날은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이었다​울음에도 곡조가 있다​그 음계를 따라 새가 둥지를 짓고 울 줄 아는 것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밤이면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선대가 그랬듯이 젓가락을 쥔 손은 떨리고 혀끝은 둔해져 발음이 허투루 새어 나갔다​늙어 가고 있구나​마른기침을 하면 어린 새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위무하는 날갯짓 아래에서 나는 갈대라는 착각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비루한 떨림으로 마디를 세우고 가슴이 벌어지듯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나는 억새,억세게 ..

좋은 시 2024.05.03

수선집 근처/전다형

수선집 근처​​​​전다형​​​​​​구서1동 산 18번지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의수족 아저씨가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땅으..

좋은 시 2024.05.03

겨울, 눈사람/신미나

겨울, 눈사람​​​신미나​​​​​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천천히 녹고 있었네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좋은 시 2024.05.03

항아리/최재영​

항아리/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나는 햇살을 움켜쥐고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아주 오랫동안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럴때마다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내게 저장된 세월을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좋은 시 2024.05.03

옹기 / 최재영

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이제야 알게 되었어요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

좋은 시 2024.05.03

대포항 근황 / 고창환

대포항 근황 / 고창환 ​​ 청봉보다 높은 파도가 허리를 편다 발이 묶인 목선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설악은 가을비에 맨몸으로 잠겨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정박중인 갈매기들이 저녁 하늘에 부리를 꽂고 끼룩끼룩 부푼 모험담을 풀어놓는데 횟집 좌판에서 비린 바람이 뼈째 썰린다 여기 퍼질러 앉아 쥐치나 씹으며 막소주 한 사발에 취해볼거나 할말이 많은 듯 입술을 들썩이는 불빛 몇 개가 바다로 떨어진다 막무가내 파도는 삼킬 것을 찾아 빗발에 젖은 목젖을 세우지만 오늘은 횟감처럼 가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포항 저물 무렵 청봉은 말없이 뿌리까지 젖는다 빗발은 미시령에서 폭설로 차오르고 희뿌연 늦가을 설악이 지워질 듯 어둠이 바다에서 느리게 걸어온다 이제 산길 뱃길 모든 소식이 끊기고 나면 모두가 한 마리..

좋은 시 2024.04.29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한쪽으로 형편없이 기운 어깨가달팽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다저 기울기는 시대의 풍속과 간난의 세월이 만든 것들끓다 솟구쳐 오르는 불온한 피몸의 제방이 되어 막아왔을 어깨시간에 단련될수록 각질은 두꺼워진다어깨는 적응 혹은 순응의 표상그러나 큰 울음의 발동기 돌릴 때는눈코입보다 먼저 시동이 걸리는 어깨봐라, 저게 저 사람의 전력이다질통, 책보, 따블백, 배낭, 가방 등속 메지는 동안파인 홈과 돌출한 뼈추 잃은 저울인 냥 기웃 둥한 생수평을 잃은 높이는 때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가반원으로 둥글게 몸을 만 사내가계단 층층에 숨을 질질 흘리며 오르고 있다

좋은 시 2024.04.29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나의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바로 전 한 걸음을 그림자에 얽어 짠다수직이 무릎을 다시 잡아당기고,내 몸을 닮아가는 그림자만 수평으로 누워 있다내가 몸속에 빛을 켜면 드러나는 저 몇 자의 피륙에서내 청춘은 등잔 기름처럼 닳고 있다이토록 환한 만성통증을 외면해온 나여네게로 가는 문門인 네 환부를 바라보아라, 그러면꼿꼿이 서려고만 했던 나 지워진 어느 날어두워서 뚜렷한 네 그림자를 밟고 있을 것이다그날은 전생으로 떠났던 한 사람 돌아와 무릎 끓고네 그림자를 ..

좋은 시 2024.04.26

붉은 염전 / 김평엽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소금 서 말 ..

좋은 시 2024.04.26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사실은 우주에서 원료..

좋은 시 2024.04.26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한 걸음 걸을 때마다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그때의 다급한 호흡은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골짜기마다 ..

좋은 시 2024.04.25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내 발등엔 지도가 있다 걷기에만 바빠 못 보던 길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툭툭 불거져 발 거죽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굽은 길도 펴가며 걸어 왔었는데 구비를 돌 때 마다 부풀며 휘어져있다 위기 때마다 불끈, 힘주어 일어섰던 불거진 마디들 저 아래 퍼런 시집살이 정맥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자지러지는 아기 업고 숨 멎을 듯 뛰던 길 남편 상여 뒤로 발 굴리며 따라가던 깜깜한 길들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세월의 발목을 잡고 여기까지 그려진 지도는 세상의 지우개로는 지울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다 그러나 길은 이어지는 것, 걸으면 또 길이 된다 여기가 종점, 발등 위는 다시 찾아 오르는 길 그래 가자! 이렇듯 걸어 왔는데 어딘들 못 가리! 다시 심장으로 되오르는 회전문 앞에..

좋은 시 2024.04.15

내등의 짐/정호승

내등의 짐 정호승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보니 내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에게 귀한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있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

좋은 시 2024.04.03

소금/이건청

소금 이건청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 이건청, 「소금」전문

좋은 시 2024.04.03

빈 자리가 가렵다/이재무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

좋은 시 2024.04.03

장독대가 있던 집/권대웅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

좋은 시 2024.03.31

그리움의 총량/허향숙

명랑 ​ 그녀는 산간 마을에 부는 바람 같다 ​ 그녀 목소리에 손을 대면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그녀 목소리의 여울에 모여드는 명랑이라는 치어들 ​ ​ ​ ​ ​ 외출 ​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

좋은 시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