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552

껌 - 김기택

껌 - 김기택 ​ ​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것 뭉개..

좋은 시 2024.02.10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서랍의 형식 김행숙(1970~ )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 똑같지 않았다 다시 차례차례 열었다 다시 차례차례 닫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 .........................................................................................................................................................................................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이 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언제 무엇을 넣었는지 ..

좋은 시 2024.02.09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 ​ 절름발이 여자가 벙어리 사내에게 눈빛으로 손가락으로 말들을 꿰매고 있다 아파트 모서리에 놓인 초원 구두 수선집 ​ 사내는 구두를 받자 닳은 뒷굽을 떼어낸다 초원 끝에서 들려오는 말갈족의 말굽소리 사내는 구름 속에 들어가 지평선을 깁고 있다 ​ 벙어리의 저린 가슴을 헤집고 나온 말의 뿌리 한 번도 사랑한단 말, 못 해주고 살아온 사내의 착한 눈망울은 디딜 곳 없는 허공이다 ​ 못처럼 박혀드는 널 남겨두곤 죽을 수 없다 마른 입술 축이는 사내의 눈이 들어가는 구두의 닳아진 내부는 저녁처럼 어두워진다 ​ 한 평 반의 수선점은 낡고도 비좁은데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하늘에 사내는 성긴 별들을 총총히 박아 놓는다 ​ ​ ​ ​ ​ ​ 시집 『쌍봉낙타의 꿈』(고요아침,..

좋은 시 2024.02.09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 ​ 아직 발굽도 여물지 않은 어린것들이 소란스레 함석지붕에서 놀다가 마당까지 내려와 잘박잘박 논다 징도 박을 수 없는 무른 발들이 물거품을 만들었다가 톡톡 터트리다 히히히힝 웃다가 아주까리 이파리에 매달려 또록또록 눈알을 굴리며 논다 마당 그득 동그라미 그리며 논다 놀다가 빼꼼히 지붕을 타고 내려가 방바닥에 받쳐둔 양동이 속으로도 들어가 논다 비스듬히 기운 집 안 신발도 신지 않은 무른 발들이 찰방찰방 뛰며 논다 기우뚱 집 한채 파문에 일렁일렁 논다 ​ ​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Hildegard Wohlgemuth)의 동화 제목

좋은 시 2024.02.09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늘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좋은 시 2024.02.09

맨발/문태준

맨발- 문태준 ​ ​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

좋은 시 2024.02.09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좋은 시 2024.02.08

무릎의 문양 - 김경주

무릎의 문양 - 김경주 ​ ​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

좋은 시 2024.02.04

허연, 면벽

허연, 면벽 ​ ​ ​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들의 주변부에서 내가 산다. ​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 가 아니다. ​ 누구는 세상 한가운데 산정(​山頂)에서 살고 누구는 세 상 한 귀퉁이에서 산다. 하여튼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건 두 렵고 신기한 일이다. 근데 그게 가끔 말썽이다. 난 또 한 사 람을 잃었다. 이젠 기까지 약해져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침마다 섞어 버린 이름들이며 술병들이며 뭐 그런 것들 이 남는다. ​ 지리멸렬해졌다. 말없이 바퀴나 굴리는 낙오자다 나는.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좋은 시 2024.02.04

허공한줌/나희덕

허공한줌/나희덕 ​ 이런 얘기를 들었어. ​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어. ​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

좋은 시 2024.02.04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좋은 시 2024.01.28

의자왕 / 신미균

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

좋은 시 2024.01.28

不惑의 구두 / 하재청

不惑의 구두 /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가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

좋은 시 2024.01.28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좋은 시 2024.01.24

보리 굴비 / 박찬희

보리 굴비 / 박찬희 깊은 곳, 동안거에 들 날이 가까워지면 옆구리가 가려웠다 수년을 가로거침 없던 길 없는 길이 아른거리기만 하고 바싹 말라버린 감정이 압착된 채 눌어붙어 겉보리 색깔이다 ​ 꼬아 내린 새끼줄이 미명을 건져 올리는 때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억, 잊은 물질의 기법을 유추해 켜켜이 돋워 꿰면 아가미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 바람이 낙관을 찍고 갈 때마다 입술이 들썩거리고 항아리 깊은 속에서 오장육부를 비워내면 아가미를 통해 내통하는 바다와 육지 ​ 숨이 찬 시절이 건조되는 동안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흘러 빠져나가는 너울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께를 바람이 변주하면 뭉툭하던 허리를 조여 맨 상처가 껍데기에서 바삭거린다 ​ 잠이 깰 때 아무 느낌이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귓속말을 차곡차곡 채우면 봄..

좋은 시 2024.01.24

삶의 본때/황동규

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좋은 시 2024.01.23

장작을 패며/오세영

장작을 패며 오세영 ​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 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 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좋은 시 2024.01.19

최문자 시 모음

최문자 시 모음 31편 ​ 《1》 ​ 고백 ​ 최문자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 《2》 ​ 거짓말을 지나며 ​ 최문자 ​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

좋은 시 2024.01.17

문성해 시 모음

문성해 시 모음 20편 ​ 《1》 ​ 검색 공화국 ​ 문성해 ​ 도서실 컴퓨터실에 붙박이로 앉은 사람들 젊어서 천천히 찌그러지고 있는 사람이나 늙어 한꺼번에 찌그러진 사람이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지독한 모니터와의 사랑이다 제가 궁금하면 검색해 보세요 그 남자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쿠키를 오븐 없이 굽는 방법을 검색하며 쿠키도 프라이팬에 구울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실이 떠나가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모두들 천기를 누설 받는 결연한 표정들이기에 관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게 하는 법과 물속에서 물고기랑 오래 대화하는 법을 내리 검색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훔쳐본 옆 사람의 모니터에서 깨알 같은 ..

좋은 시 2024.01.17